가슴으로 읽는 詩

지게/김영승

시인 최주식 2012. 8. 10. 22:37

지게

할머니들은
여기가 어디에요?
잘 묻는다

그 불안한 표정은
어머니다

여기가 어딘가? 가 아닌
弱者의 모습

전철에서 할머니들은
륙색을 하나씩 메고

驛谷에서 松內
전철은

幻燈機처럼
스친다 창밖

丹楓은 쏟아져
할머니들은

―김영승(1959~  )

내가 주로 다니는 역은 한성대·대학로·왕십리·청량리·용문 등등이다. 거기서 슬프고 괴롭고 더운 노인들이 '그래도 나는 다녀야겠다'는 표정을 하시고는 부지런히, 느리게 다니시는 것이다. 어느 환승역 지하에서 만나는, 시골 노인이 펼쳐놓은 더덕 향내는 우리를 잠시 눈물겹고 찬란한 생동의 숲으로 이끈다. 나는 그 향기를 따라 가난하나 평안한 어느 간이역을 지나고 무성한 숲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선다. 호젓한 물소리가 간절하다. 물소리는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낮고 조용히 흐르는 거야. 그게 최선이야.'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무덥고 힘겨운 일상의 시간을 잠시 떠나보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숲을 빠져나와 다시 닿는 간이역. 어머니역. 거기는 에어컨도 나오지 않고 화장실도 쾌적하지 않고 이제 아버지라는 손님도 영영 기다릴 수 없는 쓸쓸한 역이다. 곧 내가 이 여름을 지나면 닿을 '단풍역'. 우리는 등에 그, 시간이라는 '지게'를 메고 다닌다. 무겁다. 그러나 그 시간이 우리를 영원히 평안한 세계로 메고 가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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