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익는다/이상교

시인 최주식 2012. 8. 10. 22:38

익는다

처음 가는 낯선 길
멀기도 하다.

두 번 세 번 가는 동안
길가 쌀가게, 키 큰 가로수
눈에 익는다.

약국 간판, 모퉁이 구두 가게
눈에 다 익는다.

눈에 익어, 발에 익어
가까워진 길.

처음에는 낯설던 얼굴도
눈에 익고 귀에 익어
가까워진다.
점점 가까워진다.

―이상교(1949~  )

유재일
정말 그렇다. 처음 가는 낯선 길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은 멀게만 느껴진다. 처음 가는 길은 왠지 서먹서먹하고 두렵고 겁나기까지 한다. 낯선 대문 앞에서 쳐다보는 개도 금방 괄괄괄 짖을 것 같다. 멀쑥하게 키 큰 가로수나 가게도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가는 동안 가로수와 가게도 점점 눈에 익고 발에 익어 친해진다. 그러면 가는 길이 즐거워지고 더욱 가까워진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데면데면하고 멀어 보이지만 두 번 세 번 만나면 눈에 익고 귀에 익어 점점 가까워진다. 그래서 나중엔 말소리만 들어도 반가워진다.

익는다는 것은 이처럼 자주 만난다는 것이 아닐까. 자주 만나고 오고 가면 마치 나무 열매가 익듯이 정도 더욱 깊어지고 가까워지는 법이다. 가까운 친구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멀어진다. 바빠서 만나지 못할 때 '보고 싶다'라는 문자 한 통이라도 보낸다면 얼마나 반가워할까. 우리 삶에서 '만남'처럼 소중한 것이 어디 또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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