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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 안도현(1961~ )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 풀처럼 더 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소란을 잃고 의문을 버리고 이유가 없어지는 것. 이지와 논변에서 벗어나 가까운 자연의 빛에 젖어보는 것. 욕망의 끈질긴 촉수들은 스톱시켜야지. 다음엔 또 자연의 샤워에 몸을 맡겼다가, 인간으로 돌아와서는 깨끗이 울어봐야지. 그러다간 죽어도 좋겠다는 것. 죽고 싶다는 건 아니고…. 마침내는, 병들어 시름시름하는 가을이 그토록 살찐 초록을 단숨에 쓰러뜨렸는데도 아무런 항변이 없어지는 것. 그런데 가을엔 왜 자꾸 기도하고 싶어질까. 긴긴 겨울이 쳐들어오고 있어서겠지. <이영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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