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아침

반성 16 - 김영승

시인 최주식 2012. 8. 10. 23:20

반성 16 - 김영승(1959~ )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반성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인간의 음료 중에 술만큼 쓴 건 없다. 이 쓴 걸 왜 마시나. 술 아니면 안 되는 어떤 갈증이 있다고 할 수밖에. 백수의 사색, 백수의 반성, 즉 백수의 탄식이 그를 술 마시게 한다. 도대체 백수가 왜 반성씩이나 해야 하느냐고 묻지는 말자. 모든 것을 포기한 불굴의 의지가 일어나 홀연 소주병을 따는 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그는 저 통렬한 자기 풍자에 기대어 처연한 킬킬거림 속에서 한 시대의 비루함을 꿰뚫기도 하고 어루만져주기도 하였다. 술독에 빠져서도 술을 찾는 이유를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술 먹자, 눈 온다….” 우리의 젊은 날은 저 대책 없는 목소리에 의해 대책 없이 위로받았다. 백수계의 전설이 된 이 ‘아름다운 폐인’을, 인천의 어느 상가(喪家)에서 지난달 우연히 만났다. 술 끊은 지 십 년이 되어간다고 했다. 대단하다고, 하지만 어쩐지 좀 슬프다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