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나팔꽃/박명숙

시인 최주식 2012. 9. 17. 21:58

나팔꽃

첫새벽이 다가와
찬물을 끼얹자

팽팽히 귀를 매둔
어둠의 솔기가 터졌다

보랏빛 벨벳으로만
안을 덧댄 어둠이었다

여름밤은 달아나고
어둠의 딸 태어나

넝쿨손 뽑아올리며
혈통을 증거한다

한 뼘씩 허공을 디디며
아침에게로 기어간다

 

―박명숙(1955~ )

소임을 다하듯 저를 힘껏 피워내는 여름꽃이 많았다. 나팔꽃도 그런 여름꽃으로 오래된 이웃 같은 꽃이다. 하지만 이슬을 머금고 불어주는 청초한 아침 나팔 속에는 생(生)을 향한 욕망의 긴 밤이 들어 있다. 무엇인가를 잡고서야 제 삶을 밀어올리는 넝쿨식물의 숙명―. 그 길고 가녀린 넝쿨손을 앞세운 줄기로 가시나무든 허공이든 감아 쥐고 타고 오르게 한다.

그런 후에야 나팔꽃은 어둠의 솔기를 터뜨린다. 팽팽히 귀를 매어 둔 어둠, 그것도 '보랏빛 벨벳으로만 안을 덧댄 어둠'의 솔기를 환하게 연다. 그런데 손등에 닿은 듯 눈이 스르르 감기는 그 촉감은 겉모습일 뿐, 속을 들여다보면 허공을 딛고 넘어온 피가 배어 있다. 무심히 피고 지는 꽃조차 제 아침을 열기 위해 온몸으로 허공을 디디며 가는 것이다. 나팔꽃처럼, 날마다 아침을 여는 모든 삶에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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