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가을 이미지/조영서

시인 최주식 2012. 11. 25. 22:34

가을 이미지 /조영서

 

갑자기 종로에서 만난
가을.

―그 떫은 햇살 때문에

손수레 위에 빠알간
감.

(하학길 달뜨게 한 紅枾)

소꿉 같은 널판 위에 앉은
가을

만나자 서너 발 앞서 횡단로 건너는
손짓.

―금빛 그 햇살 때문에

피 맑은 살 속 깊이 나이 든
하늘.

 

―조영서(1932~ )

가을이라는 물건은 없다. 그것은 시간의 이름이니까. 감이 익어갈수록 가을이 오는 줄 알고 그 감이 짓푸른 하늘에서 모두 사라질 즈음이면 이미 그 자리에 겨울이 와 있다. 어쩌면 '가을'의 어원이 '간다'는 의미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한 해가 다 간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서울의 도심에서는 손수레에 감을 팔러 나온 이가 있으면 이미 가을이 깊어진 것이다.

서울 종로에 어느 날 문득 감을 파는 좌판이 섰다. '소꿉'놀이처럼 다섯 알씩 정성스레 쌓아올린 감은 이내 잊었던 유년의 기억 속을 밝히는 등불이다. '하학길'의 허기진 눈길을 사로잡던 남의 집 담장 너머의 감들. 잠시 '떫은' 기억의 단층(斷層) 속에 갇힌 사이에 동행은 이미 횡단보도 저편으로 가서 '손짓'을 하고 있다. 그 손짓은 유년에서부터 '나'를 잡아당기고 현재에서부터도 잡아당긴다. 노경(老境)의 금빛 햇살 속으로 이끄는 손짓인 것이다. 미숙하고 떫은 햇살이 아닌, 맑은 피로서 완성하는 노경을 예감하는 손짓이다. 청색(靑色) 가을 하늘 같은 노경을 동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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