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조운(1900~?)
석류의 계절이다. 잘 익은 석류 소식이 저 남녘에서 새빨갛게 밀고 올라온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니 쏟아져 내릴 듯 알알이 꽉 찬 석류에 눈이 다 부시다.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석류는 새콤달콤한 맛도 일품이지만, 그 모습도 묘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이거나, 슬쩍 벌어진 입술 혹은 루비 같다거나, 왠지 관능적인 느낌이 은근히 풍겨 나오는 것이다.
시조시인 조운의 생가(전남 영광)에는 아주 오래된 석류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광복 후 북한으로 간 뒤 방치된 채 있다가 지난여름에 '참수'당했다는 개탄이 씁쓸히 들려온다. 이 기막힌 시조를 탄생시킨 '문화재급' 석류나무를 못 지켰다면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두툴한 입술로 알알이 붉은 뜻을 더 이상 이르지 못하게 된 것일까. 석류나무에게 마음의 깃을 여민다. 조운은 북(北)에서 어떻게 갔는지 모르니, 그의 석류나무에라도 절하는 심정으로―. 석류를 빨갛게 익혀낸 가을볕도 낭랑함이 어느새 조금씩 사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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