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나를 들어올린다
구두 뒤축이 들렸다 닳을 대로 닳아서
뒤축과 땅 사이에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 한 공간이 생겼다
깨어질 대로 깨어진 구두코를 닦으며
걸어오는 동안, 길이
이 지긋지긋한 길이
나를 들어 올리고 있었나 보다
닳는 만큼, 발등이 부어오르는 만큼 뒤꿈치를 뽈끈
들어 올려주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 한쪽으로 기우뚱 몸이 기운다는 건
내 뒤축이 허공을 딛고 있다는 얘기
허공을 디디며 걷고 있다는 얘기
이제 내가 딛는 것의 반은 땅이고
반은 허공이다 그 사이에
내 낡은 구두가 있다
―손택수(1970~ )
어느 날 현관에 뒹구는 내 신발의 뒤축이 비스듬히 닳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감추고 싶은 상처를 들킨 듯 허전하고 민망하고 한편으로 마음이 쓰렸다. 나의 생활, 나의 피곤, 나의 빈곤한 철학, 나의 시간, 내 외진 모든 길의 풍화작용이리라. 그것은 길이 나를 조금씩 허공으로 밀어올리고 있는 것임을 이 시를 통해 알았다. 구두가 다 닳아서 맨 나중에는 내가 훨훨 날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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