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詩

무엇일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이/신경림

시인 최주식 2013. 1. 1. 21:58

무엇일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저 아름다운
풍경 속에 들어가 숨어 있는 것들이.
학교 마당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에
디딜방아 확 속에, 찬가게 마루 끝에 숨어서
짐짓 모른 체 외면하는 나를
빼꼼히 올려다보며 킬킬대고 웃는 것들이.
반들거리는 들쥐새끼처럼 눈을 빛내며
꼬리를 흔들고 귀를 쫑긋대는 것들이.
깡총 그림 속에서들 빠져나와
두려워서 층계로 도망쳐 내려오는
내 어깨와 가슴팍에 달라붙어
나를 모르겠느냐며 간질이고 꼬집는 것들이.
온통 골목과 길바닥에 널려 있는 것들이.
벽 틈과 창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이.

―신경림(1936~ )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비다. 생활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는 것, 제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잊는 것, 연민을 잊는 것, 사감(私感)을 공분(公憤)으로 만드는 사악함, 내 안에 분명하게 똬리 틀고 앉은 악(惡)의 유혹, 그러한 것들은 한번 마비되면 온 정신으로 번져서 제 이익이 곧 선(善)인 사람이 된다. 교묘한 지식인에게 많이 나타난다. 세상에는 선하게 살려는 이를 집요하게 따라붙어 야유하고 숙덕거리고 유혹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 숨어 있어 따로 구분할 수 없다. 어느 날 그 풍경 속에서 '깡총' 뛰어나와 '나를 모르겠느냐'고 덤비는 것이다. 이 시는 엄혹했던 시절 한 지식인을 둘러싼 유혹과 야유 속에서의 불안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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