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 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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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저쪽 뒷문
- 이영춘
어머니 요양원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천 길 돌덩이가 가슴을 누른다
“내가 왜 자식이 없냐! 집이 없냐!” 절규 같은 그 목소리
돌아서는 발길에 칭칭 감겨 돌덩이가 되는데
한 때 푸르르던 날 실타래처럼 풀려
아득한 시간 저 쪽 어머니 시간 속으로
내 살처럼 키운 아이들이 나를 밀어 넣는다면
아, 아득한 절망 그 절벽……
나는 꺽꺽 목 꺾인 짐승으로 운다
아, 어찌해야 하나
은빛 바람결들이 은빛 물고기들을 싣고 와
한 트럭 부려놓고 가는 저 언덕배기 집
생의 유폐된 시간의 목숨들을
어머니의 시간 저쪽 뒷문이 자꾸
관절 꺾인 무릎으로 나를 끌어당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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