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복飮福
구재기
음복을 마치고
대추알 하나 집어들다가
울컥, 목이 메인다
그 불콰하고 단단하고
윤기 자르르 넘치던 얼굴이
이리도 주름투성이가 될 줄이야
집었던 대추알을
화급하게 내려놓고
다시 재배를 올리다 보니
문득 보꾹*에 매달린
시래기 몇 두릅
낡은 두루마기를 펼치듯
아버지가 찬바람을 막고 계시다
*보꾹: 지붕의 안쪽
―웹진『시인광장』(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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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가 우는 새벽
김민철
중환자실 창은 천사가 내려오는 길
그 발자국이 성에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는데
발목이 예쁜 천사, 날개도 없이 와서
또 어느 영혼을 유리병에 담아가려는지
오늘은 빗소리 들리는데
아주 조용히 빗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보이는데
우산도 없이 와서 겨울나무는
하늘 쪽으로 제 잔뼈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러나 중환자실은 눈 오는 풍경같이 차갑고
링거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심전도 기계음만이 하루를 반복시키고
나는 또 젖은 아버지의 핏줄
속으로 들어가는 죽기 전의 아버지를 본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성에꽃이 참았던 울음을 와락 쏟는다
아름답지 않은 죽음이 또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나 보다
―계간『시와 표현』(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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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저녁
문정희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 버리고 정갈해진 노인같이
부드럽고 편안한 그늘을 드리우고 앉아
바람이 불어도
좀체 흔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성한 꽃들과 이파리들에 휩쓸려 한 계절
온통 머리 풀고 울었던 옛날의 일들
까마득한 추억으로 나이테 속에 감추고
흰 눈이 내리거나
새가 앉거나 이제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저 대지의 노래를 조금씩
가지에다 휘감는
나는 이제 늙은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장마 김주대
아버지만 당신의 생애를 모를 뿐
우리는 아버지의 삼개월 길면 일 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이는 설거지통에다가도 국그릇에다가도
눈물을 찔끔거렸고
눈물이 날려고 하면 어머니는
아이구 더바라 아이구 더바라 하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고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했으니
모두들 목구멍에다가 잔뜩 울음을 올려놓고도
내뱉지는 않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어느 때보다
무표정해진 아버지 얼굴에는
숨차게 걸어온 오십구 년 세월이
가족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전에 없이 친절한 가족들의 태도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남은 시간을 다 알고 있으면서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생애가 그렇듯 애써 태연한 건지도
여름내 아버지 머리맡에 쌓이는
수많은 불교서적들에서
내가 그걸 눈치 챌 무렵
어머니가 열어놓은 창 밖에는
긴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시집『꽃이 너를 지운다』(천년의 시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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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짐에 대하여
문숙
한 친구에게 세상 살맛이 없다고 했더니
사는 일이 채우고 비우기 아니냐며 조금만 기울어져 살아보란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노쳐녀로만 지내던 그 친구도 폭탄주를 마시고
한 남자 어깨 위로 기울어져 얼마 전 남편을 만들었고
내가 두 아이 엄마가 된 사실도
어느 한때 뻣뻣하던 내 몸이 남편에게 슬쩍 기울어져 생긴 일이다
체게바라도 김지하도
기울어져 세상을 보다가 혁명을 하고 시대의 영웅이 되었고
빌게이츠도 어릴 때부터 기울어진 사고로
컴퓨터 신화를 일궈 세계 최고 부자가 되었다
보들레르도 꽃을 삐딱하게 바라봐 악의 꽃으로 세계적인 시인이 되었고
피사탑도 10도 기울어져 세계적인 명물이 되었다
노인들의 등뼈도 조금씩 기울어지며 지갑을 열 듯 자신을 비워간다
시도 안 되고 돈도 안 되고 연애도 안 되는 날에는
소주 한 병 마시고 그 도수만큼만
슬쩍 기울어져 볼 일이다
―계간『시와정신』(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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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바치며
김인육
땅에게 아버지를 바친다
주르륵,
한 줌 흙으로 당신을 허락한다
덥석, 덥석, 깨무는 대지의 저 붉은 아가리!
평생 땅만 파먹고 살았던 농군
고맙고 미안한 신세
이제, 당신께서 보시할 차례
나무그릇에 담긴 최후의 사내가
희망도 절망도
딱딱하게 굳어버린 북어포의 사내가
나의 원본(原本)인 사내가
땅의 육보 식탁에 차려진다
일렁거리는 산천
뒤돌아보니
어느새 땅의 배가 불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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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렛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게간『시와 사람』(2002.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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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뚝 무 토막 자르듯 그 한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슨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 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 오래 가슴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ㅡ시집『노자의 무덤을 가다』(서정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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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ㅡ시집『소주병』(실천문학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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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의 안부
김나영
시들시들한 오줌줄기 같은 연락이 왔다
죙일 집에만 틀니처럼 박혀 계시다는 아버지
하루 한 번 텃밭에 물 뿌리러 갈 때만 외출 하신다는데
요즘 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데
몇 번 독한 약 뿌렸는데 통 약발이 받질 않는단다
지난 번 통화 땐 열무씨 배추씨
실한 놈으로 사서 부치라고 하셨는데
팔십 평생 한 밭에서 수확한 소출들
씨앗 팡팡 멀리 퍼트리는 힘으로
제 뿌리 죽죽 내리고들 살고 있으니
니들은 네 아버지가 일궈놓은 다모작 아니냐,
울궈 먹어도 몇 번이나 울궈 먹은 게냐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인제 그 뿌리 부실해질 때도 되았지
인제 갈 시간 되았지
내 염려에 무게를 보내 얹는 어머니
기저귀 갈 시간이라고 그만 전화를 끊자신다
링거 선을 타고 전해온 뿌리의 안부에
잊고 있었던 요의가 탱탱하게 쳐들어온다
―시집『왼손의 쓸모』 (천년의시작,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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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팔자
김나영
'야들아, 나는 가만히 앉아서 먹고 자고 테레비나 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팔자가 상팔자다' 던 아버지
그 좋은 팔자 2년도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네
온 식구들 불러 모아 놓고
사돈에 육촌아재까지 불러놓고
그것도 부족해서 내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놓고
큰 홀 빌려서 사흘 밤낮 잔치를 베푸시네
배포 큰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새 옷도 한 벌씩 척척 사주고
아버지도 백만 원이 넘는 비싼 옷으로 쫘-악 빼 입으시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리무진까지 타시고
온 식구들 대절버스에 줄줄이 태우고
수원 찍고 이천으로 꽃구경가지 시켜주시네
간도 크셔라 우리 아버지
이천 만원이 넘는 큰 돈을
삼일 만에 펑펑 다 써버리고
우리들 볼 낯이 없었던지
돌아오시지 않네
잔치는 끝났는데…
아마도 우리 아버지 팔자 다시 고쳤나 보네
―계간『계간문예』(201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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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남철
1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아
아버지 돈 좀 주세요 머라꼬
돈 좀 주 니 집에 와서 슨 돈이 벌쎄 얼맨 줄 아나
8마넌 돈이다 8마넌 돈 돈 좋아요
저도 78년도부텀은 자립하겠음다
자립 니 좋을 대로 이젠 우리도
힘없다 없다 머 팔께 있어야제
자립 78년부텀 흥 니 좋을 대로
근데 아버님 당장 만 원은
필요한데요 아버님 78년도부터
당장 자립하그라
2
뭐요 니기미이 머 어째 애비 보고
니기미라꼬 니기미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야아 이
자알 배왔다 논
팔아 올레서 돈 들에 시긴
공부가 게우 그 모양이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예끼 이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천하에
소새끼 같은 아버지
고정하십시요 야아 이 놈아
아버지
3
어젯밤에도 또 아버지 꿈을 꾸었다 아버지는
찬물에 밥을 뚜욱뚝 말아 드시면서 시커멓고 야윈
잔기침을 쿨럭쿨럭 하시면서 마디마디 닳고 망가진
아버지도 젊었을 적에는 굉장한 난봉꾼이셨다는데
꿈속에 또 꿈을 꾸었는데 아 젊은 아버지와
양장을 한 어머니가 참 보기에 좋았다 젊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한창 애교를 떨고 있었고
아 참 보기에 좋았다 영화처럼 사이좋게
나는 전에 그런 광경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시집『지상의 인간』(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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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
황강록
술 취한 아버지에게서는
좌절한 수컷의 냄새가 난다
꿈이 심란해 지는 시절이 오면
아들들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버진 왕이 되고 싶었거나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을 이루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무엇을 꿈꾸었든 꿈꾸지 아니하였든
그는 우울한 술 냄새를 풍기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내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남편
집 안은 그의 옷자락에 묻어온 어둠으로 더러워진다 아무리
불을 밝혀도 어둠은 그의 공허한 노랫소리와 뒤섞여
구석에 웅크린 채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수컷들은 꿈을 팔아 돈을 벌어오는 걸까
깔릴 듯한 꿈의 무게에 비해 손에 받아든 돈이 너무 가벼워서 술을 마시는 걸까
수천억의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내가 되어 태어날 꿈을 꾸었고
수천억의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좌절하였으니
내가 되어 태어날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나
난 여기 있다. 누군가 수천억의 가능성을 뚫고 내가 되어, 아버지가 되어
그것 봐! 할 수 있잖아! 아직 포기하지 마 넌 한 적이 있어!
귀찮게 귀찮게 꿈속에서만 소리를 지른다. 깨고 나면 기억은 흔적도 없고
귀찮게 귀찮게 술 먹었을 때만 중얼거린다. 한 소리를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깨고 나면 기억은 흔적도 없고... 자기가 왜 그랬는지도 모르고... 하긴
정자가 왜 내가 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할 리가 있겠나...
술 취한 아버지에게선 언제나
좌절한 수컷의 냄새가 나곤했다. 아들들은 그 냄새를 싫어했으나, 그로 인해
아버지를 사랑하거나 미워하였고, 어느 날
실컷 떠들고 웃고, 마침내 울고 난 술자리의 끝에서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 속에
그 냄새를 맡는다. 여자들이 흐릿한 시야 밖에서
웃으며 떠나가는 동안…
나 역시 왕이 되고 싶었거나
하늘을 날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ㅡ『현대시』(20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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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헛기침
손세실리아
병간호에서 임종까지
자식된 도리에 남달랐던 둘째 시숙
묵묵히 유품 정리하던 도중
실밥 뜯어진 목욕가방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말문을 텄다
사느라 전화조차 뜸한 장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씀 삼가셨고 매달 생활비 송금하는 막내는 가는 데마다 자랑이면서 시도 때도 없이 호출해 오라가라하는 내겐 고맙단 빈말 한 번 없으셨다 부모자식 간이니 아무렴 어때 넘기다가도 솔직히 때론 야속하기도 했지 그런데 방금 깨달았어 생각이 짧아 미처 몰랐음을 이미 넘치게 표현하셨음을……, 명절날 목욕탕에 모시고 가면 성미도 급하게 온탕에서 빠져나와 마른수수깡 같은 등 디밀고선 품앗이로 등밀이하는 동네노인들 향해 여보란 듯 연신 헛기침까지 해대면서 한껏 거드름 피우곤 하셨는데 그 기침이야말로 둘째가 최고라 치켜세워주신 거였다는 걸
이태리타월 손에 끼고
허공 내저으며 흐느끼는
삼 형제 중 아버지를 쏙 빼닮은
―월간『유심』(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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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김종해
사춘기가 끝나가자 아들은 가출을 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이었던 아들, 집과 학교가 없는 낙원을 찾아 아들은 문득 가출을 했다. 체제와 사회에 각을 세우고 갓자란 뿔을 들이댔던 어린 양 한 마리. 뿔은 가렵다. 목가적인 집안의 목책은 뚫렸고, 담임 선생님은 학내 감염을 우려해서 교실 곳곳마다 구제역 백신을 뿌렸다. 몇날 며칠 동안 텅 빈 구윳간을 보며 아버지는 잠을 설쳤고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했다.
가출한 아들을 찾아서 아버지는 노숙자의 역驛과 어린 짐승이 뛰어놀만한 야생의 산과 초원을 뒤졌다. 아들의 절친 인맥을 하나하나 찿아 헤매던 아버지,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 아들에겐 음악이 있었다. 아들은 초식草食이나 육식肉食보다 향긋한 음악에 더 정신을 쏟고 있었던 것을.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근처 남영동의 한 음악다방 DJ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 아들은 음악다방 문을 밀치고 나와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그 뒤를 아버지가 쫓아갔다. 기적소리조차 검은 서울역 뒤 골목에서 골목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달렸다. 목책 바깥을 나와 길을 잃고 달려가는 어린 양 뒤로 아버지 양이 달려간다.
석탄재 날리는 막힌 골목에서 마지막 질주는 끝나고,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짚고 헉헉헉헉. 아들은 머리를 숙이고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사이엔 세상의 어떤 인간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헉헉. 아버지와 아들은 함께 오랫동안 헉헉헉헉.
ㅡ시집『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문학세계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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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너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데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빛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밥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떴덨했는데 문득
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시집『신경림 시전집』(창비,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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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상국
자다 깨면
어떤 날은 방구석에서
소 같은 어둠이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 얼굴에 볼을 비벼보다가
공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모자나 옷을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아버지의 생의 냄새였다면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는 농토가 없다
고작 생각을 내다 팔거나
소작의 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아버지의 농사를 생각한다
그는 곡식이든 짐승이든
늘 뭔가 심고 거두며 살았는데
나는 나무 한 그루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시집『어느 농사꾼의 별에서』(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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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재무
어릴 때 아버지가 삽과 괭이로 땅 파거나
낫으로 풀 깎거나 도끼로 장작 패거나
싸구려 담배 물고 먼 산 바라보거나 술에
져서 길바닥에 넘어지거나 저녁 밥상 걷어차거나
할 때에, 식구가 모르는 아버지만의 내밀한
큰 슬픔 있어 그랬으리라 아버지의 큰 뜻
세상에 맞지 않아 그랬으리라 그렇게 바꿔
생각하고는 하였다 그러하지 않고서야
아버지의 무능과 불운 어찌 내 설움으로
연민하고 용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의
아버지를 살고 있는 오늘에야 나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애초 큰 뜻 없었다는 것을
그저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살다갔을
뿐이라는 것을 채마밭에서 풀 뽑고 있는
아버지는 그냥 풀 뽑고 담배 피우는 아버지는
그냥 담배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늦은 밤 멍한 눈길로 티브이 화면이나 쫓는
오늘의 나를 아들은 어떻게 볼까
그도 나를, 나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들아, 자본의 자식으로 태어나 자란 아버지는
자본 속을 살다 자본에 지쳐 돌아와
멍한 눈길로 그냥 티브이를 보고 있는 거란다
나를 보는 네 눈길이 무섭다
아버지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에까지
연장으로 땅을 파거나 서류를 뒤적이거나
라디오 연속극 듣고 있거나 인터넷하고 있거나
배달되는 신문기사 읽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버지 너머를 읽지 말아 다오
아버지는 결코 위대하지 않다
이후로도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다
―제51회 現代文學賞 수상시집『목화밭지나서 소년은 가고』(현대문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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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황영선
아버지는 도덕 교과서,
아버지의 교과서엔 글자가 없다
내가 읽은 많은 책들이 길이라고 우길 때에도
아버지는 내 도덕 교과서에 밑줄을 긋지 않으셨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빠져 허우적일 때에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도덕 교과서를 펼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나의 학교,
길눈이 어두워질 때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주신 도덕 교과서를 꺼내어 읽는다
세월이 가면 나의 아들딸도
내가 만들 교과서를 꺼내어 읽겠지
글자 없이 읽던 아버지의 도덕 교과서를
오늘은 소리내어 읽고 있다
―시집『우화의 시간』(2010, 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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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시집『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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