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버들 상회 / 이영옥 왕버들 상회 / 이영옥 왕버들의 깊은 그늘에 발을 담그고 늙어가는 구멍가게 예전부터 주인이던 여자는 이제 노파가 되었다 선반을 비추는 형광등의 눈은 침침해졌고 가는귀가 먹어 버린 이 집은 웬만한 기척에는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바람이 왕버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보면 가게의 실제 주인은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인연 / 김해자 인연 /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과 주황빛이 만나 제법 그럴싸한 타올로 팔려온 이 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을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온 이..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쑥대밭 / 김신영 쑥대밭 / 김신영 골프 컨트리 클럽 넘치는 21세기 저 푸른 초원 위에 쑥대밭이 없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지천으로 땅에 깔린 것이 쑥인데 여기에는 쑥대같은 어머니가 없다 퉁퉁한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머리에 수건을 얹어 모자를 쓰고 쑥밭에 앉아 쑥을 뜯으시며 쑥떡을 해먹고 쑥밥을 해먹고 쑥을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노래 / 엄원태 노래 / 엄원태 가설식당 그늘 늙은 개가 하는 일은 온종일 무명 여가수의 흘러간 유행가를 듣는 일 턱까지 땅에 대고 엎드려 가만히 듣고 심심한 듯 벌렁 드러누워 멀뚱멀뚱 듣는다 곡조의 애잔함 부스스 빠진 털에 다 배었다 희끗한 촉모 몇 올까지 마냥 젖었다 진작 목줄에서 놓여났지만, 어슬렁거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귀명창 / 장석주 귀명창 / 장석주 마당 가장자리에 풀들이 은성하다. 바랭이, 명아주, 달맞이꽃, 강아지풀, 쇠뜨기, 비름, 환삼덩굴들이 연합전선을 펼치며 마당을 노리고 있다. 며칠을 소강상태로 관망하는데, 풀들의 기세가 등등하다. 마침내 풀들의 침공이다. 정토 습격이다. 맹하 대공세다. 이 영토 분쟁에 휘말린 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문학이 어디 갔을까? / 이경희 문학이 어디 갔을까? / 이경희 수원 역사 근처의 리브로 서점에서 상사로 보이는 흰 와이셔츠가 그를 찾고 있다 어이, 문학 어디갔나? 분야별로 천정에 메뉴로 달려 있는 이름 중에 문학 담당 문학이 잠시 자리를 떴다 문학은 아마 누군가의 부탁으로 책 제목 들고 서고를 헤매고 있거나 대체 이게 어디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나무의 전모 / 복효근 나무의 전모 / 복효근 늘 다니던 산길에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 지난해 태풍 루사에 쓰러져있다 그 얽히고설킨 뿌리를 하늘로 쳐든 채 하늘 치솟던 높이도 그 끝모를 깊이도 허망하게 무너졌다 한 때는 가지 가득 꽃을 피워 꽃등을 켜놓은 것처럼 언덕이 화안했었는데 바람이 잎을 되작되작 뒤집으면 ..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와리바시라는 이름 / 이규리 와리바시라는 이름 / 이규리 젓가락과 사타구니 사이 여자라는 상징이 있다 벌린다는 것, 좋든 싫든 벌려야 하는 그런 구조가 있다 여학교 때 체육선생은 개각(開脚)하는 아이들 등을 꾹꾹 눌러 나무젓가락 가르듯 기절시키곤 했다 꼭 그래야 했을까 간혹 젓가락이 반듯하게 나뉘질 않고 삐뚤어지거나..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애콩 / 이은규 애콩 / 이은규 어느 마을에선 완두콩을 애콩이라 부른다 덜 여문 것들에게선 왜 날비린내가 나는지 푸른 날비린내가 나는 이름, 애콩 생의 우기雨期를 건너다 눅눅해져 애를 태우는 것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실까, 콩을 불도 안 켜고 꼬투리를 세워 깍지를 열었는지 텅 빈 시간 몇 알 후둑, 후두..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
제7회 노작문학수상작 제7회 노작문학수상작 물의 결가부좌 / 이문재 거기 연못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앉아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2010.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