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꽃
가령 꽃 속에 들어가면
따뜻하다.
수술과 암술이
바람이나 손길을 핑계 삼아
은근히 몸을 기대며
살고 있는 곳.
시들어 고개 숙인 꽃까지
따뜻하다.
임신한 몸이든 아니든
혼절의 기미로 이불도 안 덮은 채
연하고 부드러운 자세로
깊이 잠들어버린 꽃.
내가 그대에게 가는 여정도
따뜻하리라.
잠든 꽃의 눈과 귀는
이루지 못한 꿈에 싸이고
이별이여, 축제의 표적이여.
애절한 꽃가루가 만발하게
우리를 적셔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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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꽃
내가 그대를 죄 속에서 만나고
죄 속으로 이제 돌아가니
아무리 말이 없어도 꽃은
깊은 고통속에서 피어난다.
죄없는 땅이 어느 천지에 있던가
죽은 목숨이 몸서리치며 털어버린
핏줄의 모든 값이 산불이 되어
내 몸이 어지럽고 따뜻하구나.
따뜻하구나, 보지도 못하는 그대의 눈.
누가 언제 나는 살고 싶다며
새 가지에 새순을 펼쳐내던가.
무진한 꽃 만들어 장식하던가
또 몸풀듯 꽃잎 다 날리고
헐벗은 몸으로 작은 열매를 키우던가.
누구에겐가 밀려가며 사는 것도
눈물겨운 우리의 내력이다.
나와 그대의 숨어있는 뒷일도
꽃잎 타고 가는 저 생애의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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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안 성가
새벽부터 장대비 내리는 휴일,
오래 계획했던 일 취소하고
한나절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다.
장엄하고 아름다워야 할 합창이
오늘은 슬프고 애절하게만 들린다.
창문을 열면 무거운 풍경의 빗속으로
억울하게 참고 살았던 혼들이 떠나고
그 몸들 다 젖은 채 초라하게 고개 숙인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여, 이제 포기하겠다.
당신이 떠나는 길이 무슨 인연이라고 해도
라틴어로도, 또는 어느 나라 말로도 거듭
용서해달라는 노랫말이 아프기만 하다.
그레고리안 성가 2
저기 날아가는 나뭇잎에게 물어보아라,
공중에 서 있는 저 바람에게 물어보아라,
저녁의 해변가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갈매기 몇 마리, 울다가 찾다가 어디 숨고
생각에 잠긴 구름이 살 색깔을 바꾸고
혼자 살던 바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해변에 가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다.
파이프 오르간의 젖은 고백이 귀를 채운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짜가운 아멘의 바다,
밀물결이 또 해안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나도 낮은 파도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멈추고 석양이 푸근하게 가라앉았다.
입다문 해안이 잔잔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도 떠도는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레고리안 성가 3
중세기의 낡고 어두운 수도원에서 듣던
그 많은 총각들의 화음의 기도가
높은 천장을 열고 화음을 만든다.
하늘 속에 몇 송이 연한 꽃을 피운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멀고 하염없었다.
전생의 기억을 끌고 긴 차표를 끊는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도심을 빠져나와
빈 강촌의 햇살 눈부신 둑길을 지난다.
미루나무가 춤추고 벌레들이 작게 웃는다.
세상을 채우는 따뜻한 기적의 하루,
얼굴 화끈거리며 지상의 큰 눈물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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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
오랫동안 별을 싫어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인지 너무나 멀리 있는 현실의 바깥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안쓰러움이 싫었다. 외로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부 산맥의
높은 한밤에 만난 별들은 밝고 크고 수려했다. 손
이 담길 것같이 가까운 은하수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 맑은 별들의 숨소리도 정다웠다.
사람만이 얼굴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옛날에는 아무데서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
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요즘음, 사람들
은 더 이상 별을 믿지 않고 희망에서도 등을 돌리
고 산다. 그 여름 얼마 동안 밤새껏, 착하고 신기
한 별밭을 보다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죽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기
도 했다.
사랑하는 이여,
세상의 모든 모순 위에서 당신을 부른다.
괴로워하지도 슬퍼하지도 말아라
순간적이 아닌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내게도 지난 몇 해는 어렵게 왔다.
그 어려움과 지친 몸에 의지하여 당신을 보느니
별이여, 아직 끝나지 않은 애통한 미련이여,
도달하기 어려운 곳에 사는 기쁨을 만나라.
당신의 반응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나도 당신의 별을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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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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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봄밤에 혼자 낮은 산에 올라
넓은 하늘을 올려보는 시간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별들의 뜨거운 눈물을 볼 일이다
상식과 가식과 수식으로 가득 찬
내 일상의 남루한 옷을 벗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밤,
별들의 애잔한 미소를 볼 일이다.
땅은 벌써 어두운 빗장을 닫아걸어
몇 개의 세상이 더 가깝게 보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느린 춤을 추는
별밭의 노래를 듣는 침묵의 몸,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당신,
맨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신약 빌립 비서 2장 12절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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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얼굴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 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는 먼 길의 끝의 평화,
네 간절하고 가난한 믿음이 우리를 울린다.
오늘은 날씨가 맑고 따뜻하다
하늘을 보니 네 얼굴이 넓게 떠 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몇 개로 보인다.
너 같이 착하고 맑은 하늘에
네 얼굴 자꾸 넓게 퍼진다.
눈부신 천 개의 색깔, 네 얼굴에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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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가는 길
1
날씨 때문에 호남 쪽 여행을 취소하고
친구 넷, 하룻밤 아무 데나 가자며 떠난
늦은 오후의 춘천 가는 길.
이 낮은 산이 저 낮은 산으로 이어지고
산과 산 사이를 다듬어 채우는 비안개.
산 밑을 따라가는 강줄기 사이에서
구질스런 풋정만 신음 소리를 내는구나.
옛날인가, 아버지의 산소도 지나온 지 오래고
경춘선 정도의 기차가 동행의 기적을 울리네.
내 친구 의사 짐에게는 흥겹게 캠프 케이지로 가는 길.
오래 구겨진 몸으로 춘천 가는 길.
2
안녕하세요, 당신
몇 장의 바람이 우리를 지나간 뒤에도
상수리나무는 깊이 잠들어 코 고는 소리를 내고
우리도 그렇게 태평한 하룻밤을 가지고 싶네요.
돌아다보면 지나온 길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몸 저리는 아픔이겠지만
낯선 풍경 속에서 아직도 서성거리는
안녕하세요, 당신
그 어디쯤, 생각과 생각 사이의 공간에서
귀를 세우고 우리들의 앞길을 엿듣고 있는
같은 하늘 아래 근심에 싸인 당신,
당신의 탄식이 문득 우리를 불 밝혀주네요.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화를---
너에게 주노라, 너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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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높고 화려했던 등대는 착각이었을까.
가고 싶은 항구는 찬비에 젖어서 지고
아직 믿기지는 않지만
망망한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구나.
같이 늙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바닷바람은 속살같이 부드럽고
잔 물살들 서로 만나 인사 나눌 때
물안개 덮인 집이 불을 낮추고
검푸른 바깥이 천천히 밝아왔다.
같이 저녁을 맞는 사람아,
들리냐.
우리들도 처음에는 모두 새로웠다.
그 놀라운 처음의 새로움을 기억하느냐,
끊어질 듯 가늘고 가쁜 숨소리 따라
피 흘리던 만조의 바다가 신선해졌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랐다.
거기 누군가 귀를 세우고 듣는다.
멀리까지 마중 나온 바다의 문 열리고
이승을 건너서, 집 없는 추위를 지나서
같은 길 걸어가는 사람아,
들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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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질
낚시질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平生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中年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시집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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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있는 풍경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
흐린 아침 미사중에 들은 한 구절이
창백한 나라에서 내리는 성긴 눈발이 되어
옷깃 여미고 주위를 살피게 하네요.
누구요? 안 보이는 것은 아직도 안 보이고
잎과 열매 다 잃은 백양나무 하나가 울고 있습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을 닦고 있는 나무,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내가 몰입했던 단단한 뼈의 성문 열리고
울음 그치고 일어서는 내 백양나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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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긴 질긴 내 그림자가
팔 잘린 고목 하나를 키워놓았어.
봄이 되면 어색하게 성긴 잎들을
눈 시린 가지 끝에 매달기도 하지만
한세월에 큰 벼락도 몇 개 맞아서
속살까지 검게 탄 서리 먹은 고목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60년 넘은 힘 지친 잉어 한 마리
물살 빠른 강물 따라 헤엄치고 있었어.
정말 헤엄을 치는 것이었을까,
물살에 그냥 떠내려가는 것이었을까.
결국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못한 채
잉어 한 마리 눈시울 붉히며 지나갔어.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까
모두 그랬어, 어디로들 가는지.
고목이나 잉어는 나를 알아보았을까.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었인지도 모르고
뚝심이 없었던 젊은 하늘에서
며칠내 그치지 않는 검은색 빗소리.
시집 :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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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건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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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편지
무모한 여름이여.
꽃들은 여기저기서
책임도 지지 못할
임신을 하고,
풀도, 나무도, 나도
여름이면 도둑처럼
지붕 위로 올라갔었다.
지붕 위의 하늘은
몇 개쯤이던가.
애매한 맹세를 은근히
사방에 흘리면서
날개 빠른 새가 되어
사방을 들뜨게 했다.
아, 정말 들뜨게 했다.
모든 약속이 아름답게
향기처럼 우리를 울렸다.
궁색한 여름이여.
우리가 믿은 하늘은
구름처럼 희고
트럼펫 소리는 높고 낮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우리는 잤다.
잠속에 내린 소낙비가
여름을 적시고
피부에 남은 물기가
차갑게 외면할 때까지
우리는 바람을 타고 있었다.
파랑새도 굴뚝새도
돌아가야 할 길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해부터
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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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
당신이었군.
아직도 기다려 준 이.
가위 눌린 꿈 속 헤맬 때
창백한 미명의
창 밖에서 우는.
조금씩 더 번져가는
단순한 소리의 울림이여.
촉감이나 몸짓으로
그대를 사귀지 않았다.
당신이었군.
아직도 기다려 준 이.
가보지 못한 혼백의 나라에서
몸에 맞는 빈 방을 찾으리라.
공기의 파도를 타는
확신의 표정.
꽃잎의 끝이 천천히
그 색을 버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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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4
1.
한 그루 나무를 그린다,외롭겠지만
마침내 혼자 살기로 결심한 나무.
지난 여름은 시끄러웠다.이제는
몇 개의 빈 새집을 장식처럼 매달고
이해 없는 빗소리에 귀기울이는 나무.
어둠 속에서는 아직도 뜬소문처럼
사방의 새들이 날아가고,유혹이여.
눈물 그치지 않는 한 세상의 유혹이여.
2.
요즈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나무에게
관심이 많이 간다.
큰 가지가 잘려도
오랫동안 느끼지 못하고
잠시 눈을 주는 산간의 바람도
지나간 후에야 가슴이 서늘해온다.
인연의 나뭇잎 모두 날리고 난 후
반 백색 그 높은 가지 끝으로
소리치며 소리치며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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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5
그리던 나무를 아무래도 지워야겠다
혼자서 멀리 떠나야만
길고 편한 잠 이룰 수 있는 것 알면서
땅에 떨어지기 싫어하는
낙엽이 있다면 어쩌겠냐.
바람은 밤낮으로 거칠게 불어대고
겨울이 되기 전에 땅이 되어야 하는
약속의 시간을 어긴다면 어쩌겠냐.
언제 우리 마음을 완전히 풀어놓고
언제 인연의 수갑을 두 팔에서 풀어놓고
정신 없이 밀린 잠을 잘 수 있으랴.
마지막 날의 그림을 그린다.
마무리하던 나무를 지우고, 그 위에
모든 색깔을 다 지우고
짧고 간단한 향기를 그린다.
편안하다는 것은 결국 무엇일까.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나무 곁에 서 있는 향기가 되겠지.
여기 있다고 말할 것도 없고
생각도 없이, 만질 것도 없이
밤낮으로 보고만 있으면 편안하지 않겠냐.
지나간 날들의 많은 영혼이 돌아오면
우리들의 빈집을 그냥 내어주고
가방 가득히 들고 다니던 사랑도
우리들 긴 잠 속에 놓고 오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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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바람 센 도로변이나 먼 강변에 사는
생각없는 갈대들은 왜 키가 같을까.
몇 개만 키가 크면 바람에 머리 잘려나가고
몇 개만 작으면 햇살이 없어 말라버리고
죽는 것 쉽게 전염되는 것까지 알고 있는지,
서로 머리 맞대고 같이 자라는 갈대.
긴 갈대는 겸손하게 머리 자주 숙이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같은 박자로 춤을 춘다.
항간의 나쁜 소문이야 허리 속에 감추고
동서남북 친구들과 같은 키로 키들거리며
서로 잡아주면서 같이 자는 갈대밭,
아, 갈대밭, 같이 늙고 싶은 상쾌한 잔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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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의 피
내가 갈대를 좋아하는 이유는
죽은 듯 살아 있고
살아 있는 듯 몸을 흔들며
죽어 있기 때문이겠지.
죽고 사는 것이 같이 잘 섞여서
죽은 갈대가 산 것과 같이 노래하고
산 갈대가 죽은 갈대를 안고 춤추네.
평생 동안 한눈만 팔고 살면서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것 다 가게 하고
손 흔들어 보내면서 웃고 있네.
아끼기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팔목 한번, 어깨 한번 만지지도 않는구나.
만지고 싶어라, 날아가는 흰 갈대꽃!
매일 흘리는 피도 아무에게 보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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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금이라구?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을 되새기면서
그해에 나는 가슴 깊이 금광을 하나 넣고
무서운 법이 많았던 내 나라를 떠났어.
침묵은 금이라니까 나도 한번 빛나고 싶어
어둡던 사람들 피해 밖으로 나돌면서
압박과 설움에 뒤엉키고 기어올랐어.
침묵은 금이고 틀림없는 것이라니까
참 오랫동안 금광의 큰 가슴만 믿고
누가 뭐라고 해잘거려도 나는 침묵했어.
내 꿈이 매 맞고 발길질당했던 시절,
가엾게 질려버린 청춘을 던져주고 받은
침묵이 금이라는 무슨 공맹자 말씀!
그 금광이 폐허가 된 것을 알아버린 때는
길어진 방황, 나라 밖의 세월이 물경 35년 후,
금광이 너무 오래 가슴에 묻혀서였나,
숨통이 막혀서였나, 침묵은 아직도 금이라구?
맑은 새소리도 운치의 풍경도 사라진 폐광,
가슴속의 금광은 큰 구멍 하나로 남고
나는 자주 빈 기침만으로 아침을 맞는다.
시집 :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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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묘지
피붙이의 황량한 묘지 앞에 서면
생시의 모습이 춥고 애잔해서
눈 오시는 날에도 가슴 미어지는구나.
살고 죽는 것이 날아가는 바람 같아
우리가 서로 섞여서 어디로 간다지만
그 어려운 계산이 모두 눈이 되어 내려서
오늘은 긴 눈발 속에 아무도 보이지 않네.
무슨 소식이라도 들을까 두 손에 눈을 받아도
소식 한 장 어느새 눈물 방울로 변하고
귀에 익은 침묵만 세상의 주위를 적시네.
내 눈이 공연히 시려오는 잿빛 하늘
눈이 와서 또 쌓여서 비석까지 덮는다.
움직이는 슬픔이 움직이지 못하는 슬픔을 만나
깨끗한 무게로 서로를 달래주는구나.
그렇다. 우리는 도저히 헤어지지 않는다.
네 숨결은 묘지 근처의 맑고 찬 공기,
하늘이 더 낮게 내려와 우리는 손을 잡는다.
어느새 눈이 그치고 바람이 자고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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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에서
목욕탕에서
물이 물을 씻는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물을 비빈다.
당신의 부드러운
몸을 비빈다.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겨울에 보이는
육신(肉身)의 굴곡(屈曲).
명확(明確)히 보이지 않는 외로움.
목욕을 마치면
비 마르는 주일(主日) 오후(午後)에
명륜동(明倫洞) 골목을 빠져 나가는
무지개같이,
다섯 색깔 정도의 무지개같이
가볍고 산뜻한 현기증(眩氣症)같이.
물이 물을 씻는다.
투명(透明)한 물이
투명(透明)하지 않은 물을
비빈다.
시간(時間)의 과거(過去)와 지금이
속살거리는 목욕물 소리,
내 육신(肉身)의 모든 부분이
차고도 투명한 물이 다시 되어
명륜동(明倫洞) 2가(街)나 3가(街)에 내리는
한겨울의 눈.
우리들의 사랑도
물이었다.
지금 체중(體重)에도
남아 있는 온기(溫氣).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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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돌
나는 수석(水石)을 전연 모르지만
참 이쁘더군,
강원도의 돌.
골짜기마다 안개 같은 물냄새
매일을 그 물소리로 귀를 닦는
강원도의 그 돌들,
참, 이쁘더군.
세상의 멀고 가까움이 무슨 상관이리.
물 속에 누워서 한 백년,
하늘이나 보면서 구름이나 배우고
돌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더군.
참, 이쁘더군,
말끔한 고국(故國)의 고운 이마,
십일월에 떠난 강원도의 돌.
<그 나라 하늘빛,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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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
불란서 영화였던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
를 찾아 헤매던 처녀는 예뻤다. 몸과 마음이 모두
자유롭기 위해 등짐을 지고 떠난 처녀는, 思想에서
도, 社會에서도,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공부에서
도, 친구에게서도 벗어나려고, 끝까지 혼자 헤매다
가 마침내 완전한 자유를 가슴에 넘치게 안고 웃었
다. 그리고 완전무결한 자유의 추위와 배고픔으로
겨울의 어느 들판에서 얼어 죽었다. 나도 한때는 거
기서 얼어 죽고 싶었다.
불을 꺼버린 들꽃의 얼굴이 몇 개 보였다.
죽은 후에도 날리는 긴 머리카락의 신음,
입고 있던 마지막 옷과 장식을 풀어 날린다.
그대 떠나가는 들판의 의심스런 어두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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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물고기의 집은 물,
새들의 집은 하늘,
내 집은 땅, 혹은 빈 배.
물고기는 강물 소리에 잠들고
새들은 달무리에서 잠들고
나는 땅이 식는 몸서리에 잠든다.
평생 눈 감지 못하는 물고기는
꿈속에서 두 눈 감고 깊이 잠들고
잠자는 새들의 꿈은 나무에 떨어져
달 없는 한밤에 잠든 나무를 깨운다.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내 집은 땅의 귀,
모든 소리가 모여서 노는
내 집은 땅의 땀,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과 번민과 기쁨과 열 받기.
행복한 상징의 속살을 지나고
긴 산책에서 돌아오는
내 집은 땅, 지상의 배,
저항하는 지상의 파도에 흔들리는
내 집은 위험한 고기잡이배.
시집 :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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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무엇이 당신을 잠 못 들게 하는가.
깊은 산속에서 만난 눈사태
앞이 보이지 않게 한정 없이 내리는 꽃잎.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보다 조용하다.
온몸에 눈 덮고 잠이 드는 나무들.
아름다운 것은 조용하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간단하다.
아직 잠들지 못한 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는가.
폭설을 핑계 삼아 기대고 다가서서
아무도 말리지 못하게 서로를 만지는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큰 눈꽃 떨어지기 시작한다.
조용한 것이 무서워진다.
저녁이 내리는 우리들이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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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살아 있는 말 몇 마디 나누고 싶어서
날씨처럼 흐릿한 몸이 더워 올 때도
너는 이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고
창 밖에는 어디서 보내 온 반가운 소식,
간절한 눈발이 눈 시리게 하누나.
주위의 집들이 다시 숨기 시작하고
젊은 나무들이 앞장서 걸어 나온다.
세상이 떠다니던 모든 간절한 것들은
피곤하게 젖은 마음을 눈 위에 눕힌다.
네 모습은 아무리 더듬어도 만져지지 않고
나도 체온을 내리고 부서져 몸을 눕히랴.
누워서도 간절한 바람소리 들리냐,
바람에 섞여 오는 진한 목소리 들리냐,
나도 멀리에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언제 추위를 이겨냈다는 신호등 켜지고
해석하기 어렵게 지워진 벽화의 주위,
간절한 것 몇 개 남아 떠날 차비를 한다.
<문학사상,2001,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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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얼굴
그만한 고통도 경험해보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를 기웃거릴 수 있겠냐구?
그만한 절망도 경험해보지 않고, 누구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 청할 수 있겠냐구?
벼랑 끝에 서 있는 무섭고 외로운 시간 없이
어떻게 사랑의 진정을 알아낼 수 있겠냐구?
말이나 글로는 갈 수 없는 먼 길의 끝의 평화.
네 간절하고 가난한 믿음이 우리를 울린다.
오늘은 날씨가 밝고 따뜻하다.
하늘을 보니 네 얼굴이 넓게 떠 있다.
웃고 있는 얼굴이 몇 개로 보인다.
너같이 착하고 맑은 하늘에
네 얼굴 자꾸 넓게 번진다.
눈부신 천 개의 색깔, 네 얼굴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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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득한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 오르는
화가 마띠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 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 가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에 부쳐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냄새 가볍게 껴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흐리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고 낮음이 가늠되지 않는
야 정말, 아득한 것만 살아남는 이 가을,
어렵게 살아온 천지간의 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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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나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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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구름이 구름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내듯이
아,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만나고 싶다. 당신을
구름이 구름을 갑자기 만날 때
환한 불을 일시에 켜듯이
나도 당신을 만나서
잃어버린 내 길을 찾고 싶다
비가 부르는 노래의 높고 낮음을
나는 같이 따라 부를 수가 없지만
비는 비끼리 만나야 서로 젖는다고
당신은 눈부시게 내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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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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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노래
허둥대며 지나가는 출근길에서
가로수 하나를 점찍어두었다가
저문 어느 날 그 나무 위에
새 둥지 하나를 만들어놓아야지.
살다가 어지럽고 힘겨울 때면
가벼운 새가 되어 쉬어가야지.
옆에 사는 새들이 놀라지 않게
몸짓도 없애고 소리도 죽이고,
떠다니는 영혼이 아는 척하면
그 추운 마음도 쉬어가게 해야지.
둥지의 문들 열어놓고 무엇을 할까.
얼굴에 묻어 있는 바람이나 씻어줄까.
조건을 달지 않으면 모두가 가볍군.
우리들의 난감한 사연도 쉽게 만나서
당신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해도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지 웃고 있구나.
- 시집: 그 나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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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풍경
새 한 마리 작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나뭇가지 작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새가 날아가버린 후에도 나뭇가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떨고 있습니다.
나뭇가지 혼자 흐느껴 우는 것 같습니다.
남아 있는 풍경이 혼자서 어두워집니다.
- 시집: 이슬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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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비엔나 오페른 링의 시월 저녁.
걸어가는 가늘고 낮은 바람 사이로
한 나그네가 다른 나그네를 알아본다.
철새도 아닌 새들까지 다 어디로
부산하게 떼지어 날아가버리는 시간,
아무 이야기라도 눈자위를 적시고 마는
낯 모를 골목길을 오래 헤매면서도
나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덧 꽃과 나비의 세월 다 지나고
마지막 떠나는 새들에게 먹히기 위해
더 진한 색깔로 하나씩 열매를 장식하는
그림자도 지워버린 나무의 지혜여
천하가 도도히 헛것으로 향해 간다는
음침한 소문 속에서도 열매를 익힌다.
혹은 환갑을 한두 해 남긴 김광규 시인이
혼자 장바구니 든 채 고개 숙이고 걸어가는
오페른 링의 길고 미지근한 저녁 미소가
내게는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열매의 땀방울이여,
욕심을 버리려고 몸을 터는 이 계절의 나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될 수 없고
보이는 몸은 영원한 몸이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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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꽃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피부를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피어 여기서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가기 때문인가. 아무려나. 흐려져가는 분별력 위에
선 신비한 땅이여, 우리가 언제 당신 옆에 가면 그때
부터는 당신의 알뜰한 솜씨를 다 알아 볼 수 있겠는가.
흙이 꽃이 되고 흙이 깨가 되는 그 흥겨운 요술을 매일
보며 즐길 수 있겠는가.
늘어만 가던 궁금증이 하나씩 해결되는 깨알 같은 눈뜸이여
나는 오늘도 깨꽃 앞에 앉아 아른거리는 그 말을 기다리느니.
어느 날 내 몸도 깨꽃이 되면 당신은 내 말과 글이
드디어 향기를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찾아 헤매던 날들은 지나고
드디어 신선한 목숨이 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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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구래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메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속 깊이 숨은 것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면
약 바르지 못한 온 몸의 상처를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는가
쉽게 따뜻해지지 않는 새벽 침상,
아무리 인연의 끈이 질기다 해도
어차피 서로를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것
아는지, 빈 가슴 감춘 채 멀리 떠나며
수십 년의 밤을 불러 꿈꾸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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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길들이기 3
여자의 젖꼭지는 젖먹이들의 명줄이지만,
남자의 젖꼭지는 무슨 소용일까. 쓸데없는 남자의
젖꼭지는 염색체의 결함 때문이라는군.
인간이 처음 수태 되었을 때는 모두가 여자라는 거야
수태 후 몇 주일이 지나서 갑자기 중간에 남성이 된다는 거지.
그 후의 아홉 달은 호르몬이 남자를 완성시키지만, 처음 있던
젖꼭지는 다 지우지 못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었다구?
우리 사이에 있는 손과 입
여자와 남자의 얼굴이 웃고
두 얼굴이 하나 되어
피카소의 그림처럼 예쁘다
반쯤 비어 있는 사람이 예쁘다.
다리와 다리가 껴안고
둥근 피부와 굴곡의 피부가 섞인다.
남자는 처음에는 여자였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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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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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건넛집 지붕에는 흰 박꽃이
수없이 펼쳐져 피어 있었다.
한밤의 달빛이 푸른 아우라로
박꽃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 박꽃이 저렇게 아름답구나.
- 네.
아버지 방 툇마루에 앉아서 나눈 한마디,
얼마나 또 오래 서로 딴생각을 하며
박꽃을 보고 꽃의 나머니 이야기를 들었을까.
- 이제 들어가 자려무나.
- 네, 아버지.
문득 돌아본 아버지는 눈물을 닦고 계셨다.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내 아이들은 박꽃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도 못하고
하나씩 나이 차서 집을 떠났고
그분의 눈물은 이제야 가슴에 절절이 다가와
떨어져 있는 것이 하나 외롭지 않고
내게는 귀하게만 여겨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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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의 外國 - 2
안락한 外製 소파에 틀고 앉아
안락하지 못했던 東學의 傳記를 읽는다.
헐벗은 백년 전 전라도, 충청도 땅에
볼품없이 씻겨 가는 人骨을 본다.
외국에 나와서 보면 더욱 힘든다.
삿대 없이 흐르던 가난한 나라,
흙먼지에 얼굴 덮인 竹槍의 눈물,
그날의 선조가 야속한 官軍이 아니고
감투 눌러쓰고 돌아앉던 兩班이 아니기를.
한여름 냉방 장치의 응접실에서
문득 얼굴에 흙칠을 하고 싶다.
돌아앉아 숨죽이던 그 양반의 버선짝.
- 시집: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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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나라
하루종일 봄비가 의심하는 세상을 적신다.
사람이야 언제 어디서고 죽게 마련이지만
외국의 봄날 흐리게 허물어진
동생이 저녁까지 봄비 되어 울고 있다.
비는 내려서 땅에 스며들고
스며서 땅 사이로 사라지는 침묵.
해직당한 고국을 그리워하던
적막 강산이 눈물 사이로 보인다.
온몸이 젖어서 두 눈을 크게 뜨는 너.
(혹은, 나.)
비는 왜 이렇게 소리치며 밤새 오는지.
빗소리 듣다가 풋잠 잠시 들고
또 언뜻 잠 깨어 다시 듣는 빗소리
집 밖의 사방에는 벌써 수상한 미명.
춥다.
너도 춥지?
- 시집: 이슬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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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심장에서 메아리까지
우리들의 슬픔은
그늘이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사랑,
옛날에 옷벗은 우리들의 상처도
메아리다.
오늘은 그늘에서
비가 잠을 잔다.
잠속에서도
우리들의 몸 속이 젖는 소리.
젖은 나이의 보도 위에
우리들의 낙엽이 흙이 된다.
내 심장에서 흙까지
오래 울리는 당신의 메아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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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 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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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부르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운문의 목소리로 이름 불러대면
어느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
시치미떼고 옆 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가문 밤에는 잠꼬대 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늙은 기적 소리가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 다닌다.
목소리라고 부를만 한 것이 있었을까.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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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1
1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2
그렇다. 젊었던 나이의 나여.
평생 도망가지 못하고 막혀 있는
멀리 누워 있는 저 호수도
물풀의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오래 짓누르던 세월의 불면증을
몇 번이나 호수에 던져 버린다.
머리까지 온몸이 젖은 채로
잠시 눈을 뜨고 몸을 흔든다.
연한 속살은 바람에 씻겨
호수의 살결이 틈틈히 트고 있다.
3
어디였지?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호수도, 바람도, 다리도
대충 냄새로만 기억이 날 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가끔
귓속의 환청의 아우성
아무도 우리를 말릴 수 없다
상처의 나이의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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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2
오래 먼 숲 헤쳐온 피곤한
상처들은 모두 신음 소리를 낸다.
산다는 것은 책임이라구.
바람이라구, 끝이 안 보이는 여정,
그래. 그래 이제 알아들을 것 같다.
갑자기 다가서는 가는 바람의 허리.
같이 있어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없어도 같이 있는, 알지?
겨울밤 언 강의 어둠 뒤로
숨었다가 나타나는 숲의 상처들.
그래서 이렇게 환하게 보이는 것인가,
지워버릴 수 없는 그해의 뜨거운 손
수분을 다 빼앗긴 눈밭의 시야,
부정의 단단한 껍질이 된 우리 변명은
잠 속에서 밤새 내리는 눈먼 폭설처럼
흐느끼며 피 흘리며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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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의 율동
─잭슨폴락 전시회
많이 아프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것보다 더 아픈.
황홀하고 어지러운 밤낮의 취기에서
뛰어나가 헤매며 머리 부딪혀 피 흘리는
맹목의 밤벌레의 울음처럼, 착각처럼
허기져서 목숨 털어내는 날개들의 춤.
한순간에 타 죽어 버리는 순교의 폭발처럼
뜨거운 열망의 거부처럼, 절망의 혼돈처럼
너무도 대상이 없는 도시를 채워가는 길.
어려운 길들의 생애처럼, 버려진 기도처럼
그 길에서 떨어져내린 침묵처럼, 우수처럼
별들이 환한 밤에는 두 손에 느껴지는 네 몸.
숨어 사는 작은 꽃의 소용돌이 흐트러짐.
내일은 또 다른 색깔의 아픔이라고 했던가,
누워 있는 넓은 화폭에 다시 붙는 이 불!
시집:<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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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2
이른 아침에는 나무도 우는구나.
가는 어깨에 손을 얹기도 전에
밤새 모인 이슬로 울어버리는구나.
누가 모든 외로움 말끔히 씻어주랴.
아직도 잔잔히 떨고 있는 지난날.
잠시 쉬는 자세로 주위를 둘러본다.
앞길을 묻지 않고 떠나온 이번 산행.
정상이 보이지 않는 것 누구 탓을 하랴.
등짐을 다시 추슬러 떠날 준비를 한다.
시야가 온통 젖어 있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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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4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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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
1
드뷔시의 등에
눈이 또 내린다.
1950년대의 막역한 친구들이
골방의 외로움을 털고 일어나
백합을 본다.
젊은 여자는 대체로
동양이고 서양이고
나신이 더 매력적이지만
백합보다 어린 금발의 꽃을
나는 고정시킨다.
2
청년이 된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크가
음악회장을 빠져나와
바이올린 모양의 정구채로
창창하게 정구를 친다.
나는 결정적으로 대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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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새들은 아침잠도 없구나.
동이 터오는 기미만 보이면
일어나 세수하고 우리를 부른다.
그 푸른 목소리
몸을 높이 올리면
지상의 먼 거리도
손가락 사이에서 보이고
눈을 바로 뜨면
자유의 모진 아우성도
아름답게 보인다.
둘도 하나로 보인다.
그러니 어디에 있으면 어떠랴.
우리들의 예감이야 하나밖에 없지.
사방이 막히고 어두워도
오늘도 그 불 같은 목소리.
새들은 기미만 보고도
우리들의 게으름을 일깨워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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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노래 4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오르는 몇 개의 구름.
밤에는 단순한 물기가 되어 베개를 적시는 구름.
떠돌던 것은 모두 주눅이 들어 비가 되어 내리고
내가 살던 먼 갈대밭에서 비를 맞는 당신.
한밤의 어두움도 내 어리석음 가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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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
1
날자.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헤매고 부딪치면서 늙어야지.
(外國은 잠시 여행에 빛나고
이삼년 공부하기 알맞지
십년이 넘으면 外國은
참으로 우습고 황량하구나.)
자주 보는 꿈 속의 나비
우리가 허송한 시간의 날개로
바다를 건너는 나비,
나는 매일 쉬지 않고 날았다.
節望절망하지 않고 사는 表情표정
절망하지 않고 들리는 音樂음악.
2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몸으로
비가 오는 날 저녁
한국의 港口항구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낯선 길에 서 있는 木蓮목련은
꽃피기 전에 비에 지고
비 맞은 나비가 되어서라도
그 날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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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의 질문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겨울바람에 피부가 터진
말채나무가 대답도 없이 웃는다.
꿈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환갑 넘은 바람 몇 개가 일어나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게으른 열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며
낮은 하늘을 흔들어댄다.
이 추위를 보내면 한 세월이 가고
하얀 말채나무 꽃이 온몸을 덮는다니
그때면 내 뻣속에 감추었던 우수의 철책 거두고
정처 없던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지.
늙은 새 한 마리가 날갯짓 멈추고
얼어버린 하늘을 겨우 넘어가는가,
하늘이 늙은 새를 안아주고 있는가.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완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는 것도
빈 말채나무에서는 보이지 않고
맑고 푸르른 유혹의 발걸음이
겨울이 끝나는 날처럼 따뜻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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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도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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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도 2
1
이 겨울에도 채워주소서.
며칠째 눈 오는 소리로 마음을 채워
손 내밀면 멀리 있는 약속도 느끼게 하시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소리도 듣게 하소서.
떠난 자들도 당신의 무릎에 기대어
포근하게 긴 잠을 자게 하소서.
왜 깨어 있지 않았느냐고 꾸짖지 마시고
당신에게 교만한 자도 살피소서.
어리석게 실속만 차리는 꿈속에서도
당신의 아픔은 당하지 않게 하소서.
겨울의 하느님은 참 편안하구나.
2
내가 눈물을 닦으면
당신은 웃고 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슬픔 속의 노래다.
노래 속의 기쁨이다.
벌판에서 혼자 떨던 나무도
저 멀리 다음해까지
옷 벗어던지고 혼절해버렸구나.
내가 아는 하느님은 편안하구나.
*시집 '그 나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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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用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이디오피아에서, 소말리아에서
중앙아프리카에서
굶고 굶어서 가죽만 거칠어진
수백 수천의 어린이가 검게 말라서
매일 쓰레기처럼 죽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에서
오늘은 해골을 굴리고 놀고
내일은 정글 진흙탕 속에 죽는 어린이.
열 살이면 사람 죽이는 법을 배우고
열두 살이면 기관단총을 쏘아댑니다.
멜 살바돌에서, 니카라과에서
중앙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해 뜨고 해 질 때까지 온종일
오른쪽은 왼쪽을 씹고
왼쪽은 오른쪽을 까고
대가리는 꼬리를 먹고
꼬리는 대가리를 치다가 죽고.
하루도 그치지 않는 총소리,
하루도 쉬지 않는 殺人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어디 있습니까.
이란에서, 이라크에서, 이스라엘에서
레바논에서, 시베리아 벌판에서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하느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남들의 슬픔을 들으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고
남들이 고통 끝에 일어나면
감동하여 뒷간에서 발을 구릅니다.
어느 시인이 쓴 투쟁의 노래는 용감하지만
내게 직접 그 고통이 올 때까지는
어느 시인이 쓴 위로의 노래는 비감하지만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 하느님
그러나 시인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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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에서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ㅡ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ㅡ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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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개
마종기(馬鐘基, 1939~ )
'현대문학'을 통해 1959년에 데뷔.
'연가'는 연작시.
의사인 그의 시는 삶에서 오는 인간 통찰에 그 특징이 있다.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1960)', '겨울 이야기(1964)' 외에
김영태, 황동규 외의 3인 시집ㅇ린 '평균율 1(1968)',
'평균율 2(1972)'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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