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 윤오영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 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 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 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 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 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 됐소, 농주(農酒)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 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 버렸다.
이윽고
"살펴 가우."
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윤오영(尹五榮, 1907-1976)
이력
수필가. 서울생. 호는 치옹(痴翁), 동매실주인(桐梅室 主人). 보성교보 교직생활. 1959년 [현대문학]에 수필 <측상락> 발표 후 다수 창작.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수필의 창작과 이론 전개에 힘을 씀. 정교한 문장으로 사물을 고전적 세계와 접목 시킴.
작품 경향
1973년에 나온 제 1수필집 〈고독의 반추(反芻)〉는, 그가 조심스럽게 써낸 첫 10 년간의 글에서 추려 낸 것들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 수필 문학의 획기적인 이정표(里程標)의 구실을 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전통에 연결되는 우리글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싫증적으로 보여주었고, 한편 그의 글은 우리의 향수를 풀어 주면서도 청신하고 유려(流麗)하다.
둘째로, 그는 수필이 문학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글과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고, 다른 장르의 작가 이상의 수련과 습작이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몸소 실천했다.
셋째로, 수필의 생명인 자아(自我)의 경지(境地)를 살려 나가는 점을 뚜렷하게 한 의미를 인식하게 한다. 그의 수필 속에는, 고독에 시달리고, 고독을 음미하고, 고독을 사랑하기도 하는 품위와 기골(氣骨)과 통찰력(洞察力)을 갖춘, 그러면서도 정감(情感)의 순박함을 지닌 지성인으로서의 그의 인간이 투영되어 있다.
윤오영에 대한 피천득의 평가
그의 수필이 소재는 다양하다. 그는 무슨 제목을 주어도 글다운 글을 단시간 내에 써낼 수 있다. 이런 것을 작자의 역량이라고 하나, 보다 평범한 생활에서 얻는 신기한 발견, 특히 독서에서 오는 풍부하고 심각한 체험이 그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소득은 그가 타고난 예민한 정서, 예리한 관찰력, 놀랄 만한 상상력, 그리고 그 기억력이 산물이다.
대표작
수필집 : [고독의 반추](1974) 등
작품 : <방망이 깎던 노인>, <달밤>, <양잠설>, <마고자> <곶감과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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