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짐승처럼 예민해져야 한다.
봄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젊은 날, 나는 문화의 힘으로 자연을 거스르며 살았을 것이다. 젊은 몸의 자부심에 기대어 세월이 이울면, 오히려 나는 내가 이성으로 구축하는 반자연의 힘의 효력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젊음은 자연을 경멸한다. 젊음은 스스로의 안에서 치솟아오르는 힘에 매혹되어 자연이 가르치는 바를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젊음은 자연보다 더 힘세기 때문이다. 젊음은 자연 앞에 오만하게 버티고 서서, 죽음이여 오라, 고 큰소리친다. 그러나 젊은이가 소환하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관념일 뿐이다.
김정란(시인, 원주 상지대 인문과학부 교수, 문학평론가)
젊었을 때는 가을을 좋아했었다. 그것도 늦가을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내 마음 안에서는 활발하게 詩情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었다. 내게 가을은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었다. 11월이 되면, 나는 고독을 자부심으로 삼는 보헤미안처럼 깊은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고는 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그 공간에서 젊은 나의 후각은 맹렬하게 낭만적인 죽음의 냄새를 찾아 움직였다. 주위가 어두울수록 먹이감을 잘 찾아내는 공격적인 야생동물처럼. 죽음은 화려한 사치처럼 나를 매혹했다. 오, 한때 누구나 다 그런 죽음을 꿈꾸지 않는가. 사람들은 젊어서 죽고 싶어한다. 육체가 매끈하며 아름다울 때, 늙은이들의 축 처진 육체를 경멸하며, 오만하고 건방진 왕처럼....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을이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몸이 가을을 닮아가고 있는 시점부터가 아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나는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젊고 싱싱하던 몸은 도망가고, 늙고 비실대는 몸이 내 존재의 용기로 덩그마니 남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때 가을의 추위는 사뭇 두려움과 슬픔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두렵고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늙은 육체가 젊은 육체와는 다른 <약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잃어버린 자아의 영광스러운 힘 대신에 타자의 힘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으니까. 물러선 자아의 또렷한 자리에 무수한 타자들의 흐릿한 윤곽이 조심조심 손가락을 들이민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으니까. 늙은 몸은 서서히 엷어지고 흐릿해진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물질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오만하고 똘똘했던 젊은 나는 이제 비로소 진실로 멍청해지고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 멍청함의 힘으로 나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연과 함께 숨쉬는 그 몸은 가을이 풍기는 상실의 냄새를 잘 견뎌내지 못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내 몸은 자연의 소리를 겸손하게 듣는다. 그것은 내 몸이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과도 같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 자연이 느끼는 슬픔이 내 몸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온다. 나는 가을과 함께 아프고, 가을과 함께 차가와지고, 가을과 함께 힘겹게 숨쉬기 시작한다. 겨울이 되면, 가슴이 칼로 에이는 듯이 아파진다. 겨울에 나는 오래도록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죽음은 젊은날 내가 탐닉하던 관념적이고 낭만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 죽음은 진짜 죽음, 육체의 소멸, 부패, 자연으로의 회귀, 원소 상태로의 축소, 자아의 상실이다. 나는 겨울에 정말로 거의 죽는다. 겨울에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치 동면하는 짐승처럼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봄을 기다린다. 겨울은 얼마나 긴지.....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은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눈은 그렇게 차가우면서도 따스하기 때문이다. 눈은 차가움의 외양 안에 따스한 화롯불을 지피고 있다. 눈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불이다. 눈이 많이 내렸던 올겨울은 그래서 조금 지내기가 괜찮았다. 창문을 열면 얼음램프가 앙상한 가지를 포근하게 녹여주고 있었다.
이제 아주 멀리에서 봄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내 몸도 조금씩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빛이 찾아오는 것이다! 지렁이들과 뱀들과 질경이들과 민들레들도 바빠지겠지.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내 약해진 늙은 몸은 그것들을 항해 조심조심 다가간다. 그것들과 함께 부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번의 부활이 내 앞에 남아있는 것일까? 몇 바께스의 햇빛을 나는 앞으로 누릴 수 있을까? 나는 몇 번이나 더 지렁이들과 벰들과 질경이들과 민들레들에게 손을 건넬 수 있을까?
그러나 봄은 너무 아름다워서 조금 경박하고 유치하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너무 뻔하기까지 하다. 나는 개나리꽃이나 진달래꽃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사물이 저렇게 뚜렷한 색깔을 가질 수 있담, 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쩌자고 저렇게 낙천적이고 분명한, 나대는 색깔을 제 색으로 택했다는 말인가. 뭔가 일부러 만든 것 같지 않은가, 그런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봄의 존재 이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봄은 정말로 덧없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깐 젊고 잠깐 아름답듯이, 봄은 잠깐밖에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봄은 아주 유치한, 자기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봄은 중간의 덕성을 아직 배우지 못한 계절이니까. 중간색의 봄이라니,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젊은이들이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 없이 유치하듯이 봄은 조금 덤벙댄다. 그러나 봄과 그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계곡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겨울의 슬픔은 노래로 바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이제 존재의 낮은 능선을 빠른 걸음으로 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엄마가 빨아 너는 아기의 하얀 기저귀는 아기의 엉덩이처럼 토실토실하고 몽실몽실하고 부드러운, 부드러운 바람 앞에서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냄새를 풍길 것이다. 가만히 귀기울여보라. 봄은 행복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가까이 너무나 물질적으로 있다는 것을 옹알대며 이야기한다. 그 얘기를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그 이야기로 우리는 겨울의 아픔을 뛰어넘는 것이니까. 단순한 행복의 힘으로 우리는 대지의 무거움을 이기고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니까. 봄에는 짐승처럼 예민해져야 한다. 봄은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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