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불행하게 살다 간 시인, 오랫동안 어둠에 묻혀 있던 시인,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투명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시인, 가네코 미스즈
■ 영원히 망각 속에 갇힐 뻔했던 동요 시인의 재발견(작가 및 작품 소개)
일본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작품이 실린 동요 시인 가네코 미스즈, 그녀는 한 사람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우연히 그녀의 동요 「풍어」를 읽은 동요 시인 야사키 세쓰오(矢崎節夫)는 그 감동을 잊지 못해 그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여 그 결실이 16년 만에 이루어져 오랜 시간 어둠에 갇혀 있던 가네코 미스즈가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풍어
아침놀 붉은 놀 풍어다 참정어리 풍어다.
항구는 축제로 들떠 있지만 바닷속에서는 몇만 마리 정어리의 장례식 열리고 있겠지.
·가네코 미스즈 재평가 생존 시 시인이자 작사가, 불문학자였던 사이조 야소(西條八十)로부터 ‘젊은 동요 시인의 거성’이라고 불렸던 가네코 미스즈. 그녀는 생을 마감함과 동시에 시단은 물론 세인으로부터 잊혀졌다. 그러나 야사키 세쓰오의 기나긴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84년 시집이 출판되자마자 순식간에 그녀는 다시금 살아나 유명해졌다. 현재 일본의 초등학교의 국어 교과서에 그녀의 동요 「참새의 어머니」 「이상함」 등이 채택되어 실려 있으며, 도쿄대학교의 국어 입시 문제에 출제되기도 한다. 또한 독일어, 프랑스어, 몽골어를 비롯해 세계 13개 언어로 번역·출판되었다.
참새의 어머니
어린애가 새끼 참새를 붙잡았다.
그 아이의 어머니 웃고 있었다.
참새의 어머니 그걸 보고 있었다.
지붕에서 울음소리 참으며 그걸 보고 있었다.
·동요 시인 가네코 미스즈의 탄생 가네코 미스즈는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김영랑과 같은 해(1903)에 야마구치현 나가도시 센자키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으나, 그녀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남동생은 시모노세키에서 우에야마분에이도라는 서점을 하는 이모집에 양자로 보내졌다. 그리고 몇 년 후 이모가 죽자 어머니가 이 집으로 재가를 하며 시모노세키로 떠나 미스즈는 오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항상 웃는 얼굴과 다정하고 상냥한 성품이던 그녀는 우등생으로 여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어머니가 계시는 시모노세키로 옮겨 가 우에야마분에이도의 분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해는 가네코 미스즈에게 뜻 깊은 해가 되는데, 바로 이해에 그녀는 본명인 데루 대신 미스즈라는 필명으로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또 『동요』 9월 호를 비롯하여 무려 4개 잡지에 시가 실리면서 시인으로 데뷔했다. 이때의 감격을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동요라는 것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한 달, 조심조심 썼습니다. 낙선했다고 생각하고는 그것을 확인하기 싫어 잡지를 보지 않고 지냈습니다. 기쁜 것을 넘어 울고 싶어졌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고기
바다의 물고기는 가엾다. 쌀은 사람이 만들어 주지, 소는 목장에서 길러 주지, 잉어도 연못에서 밀기울을 받아먹는다.
그렇지만 바다의 물고기는 아무한테도 신세지지 않고 심술 한 번 부리지 않는데 이렇게 나에게 먹힌다.
정말로 물고기는 가엾다.
『동요』에 그녀의 시를 뽑아 실은 동요 시인 니시조 야소는 “어딘가 포근하고 따스한 인간미가 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 느낌은 마치 영국의 크리스티나 로제티와 같다. 여류 동요 시인이 전무한 오늘날 노력해 주길 바란다”라고 미스즈와 그녀의 작품에 대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이런 높은 평가에 감격하여 가네코 미스즈는 더욱 부지런히 작품을 써서 『동요』에 투고했고 이후 매달 서너 편이 실렸다. 이렇게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가네코 미스즈는 1926년 이즈미 교카, 기타하라 하쿠슈, 시마자키 도손 등 일본의 유명 시인들이 회원으로 있는 ‘동요시인회’의 최연소 회원이 됨으로써 동요 시인으로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