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깊은 발자국 / 유홍준

시인 최주식 2010. 1. 26. 23:21

깊은 발자국 / 유홍준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워보지도 못한 저것들이

떡잎 같은 발꿈치 여린 울대 더 이상 적시지 못하고

죽어 갔다니,

봄가뭄 보름 끝에 기어이

후드득 비가 듣는다 금방, 깊은 발자국 속을 채운다

반갑다 어미개구리 哭소리......

봄가뭄 보름이 저 울대 저렇듯 맑게 단련시켜 놓다니,

바람 자는 내일 아침이면 무논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백로처럼

죽음이 지나간 물 속의 내 발자국

물끄러미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무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가

내 발자국 속의 주검 집어 올려 삼키는 것, 볼 수 있겠다


계간 <시와시학> 200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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