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낮은 웃음소리, 흘吃 / 조정인.

시인 최주식 2010. 1. 28. 22:00

낮은 웃음소리, 흘吃  / 조정인.


  그만 헛발 디딜 뻔 했다 정작 신음하는 건 내가 아닐지 모른다 바다는 안으로 깊고 푸른 그늘을 품어 사뭇 일렁였고 너른 등덜미를 눈으로만 쓸어보던 내게 띄엄띄엄 등 푸른 육질의 신음소리가 만져졌다


 창이 많은 기선을 띄워 선체에 머무는 흘수선을 그려보았다 선체에 이르러 물결이 말을 더듬거나 낮게 웃음소리를 내거나 머뭇거리는 ‘吃’에 대해 담소를 나눌 때 우리 곁으로 천 년 전의 해풍이 지났다 천 년 전, 그 은발의 해풍과 눈이 마주치자 하염없이 홀리는 나를 놓칠까 두려워 당신의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천 년 전에도 우리는 어린 짐승이 곤히 잠 든 것 같은 바위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있었다 큰 물고기 뼈바늘로 그물을 깁는 당신에게 모시잎사귀에 싸서 찐 보리떡을 내왔고 대바구니엔 구운 생선이 두 마리, 머루랑 다래도 있었다 그때도 해풍은 당신의 머리칼을 희롱하다 그늘진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았고 바닷가 외딴집의 내력을 간섭했다 저녁 어스름이 기어든 외딴집은 말을 더듬거나 멈칫거리거나 손을 입에 가져가며 낮게 웃고는 했다     

 

 하루를 천년처럼 살리라 떠나온 길, 이쯤이 차선의 치유는 되겠다 불빛 발갛게 스민 저녁 창호를 품게 된 가슴으로 흘러내릴 듯 낮게 웃음소리를 내는 수평선이 들어섰다 아직도 곤한 잠에 든 섬 하나를 데리고…

 천 년 전 그해 나라에는 큰 전쟁이 있었고 어느 새벽 저 물길로 당신은 장도長途의 길을 떠났다 윗목에, 등경 같은 여자를 덩그러니 놔두고


                                                                                                           2008 봄 / 시평특집 2- 1990년대 시인 24인선.

 

 

 

 

                                               

                                                                                                                       조정인 시인
   

   서울 출생
   
199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에서 대상
    2004년 시집 -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천년의 시작)

    2007년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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