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쉬어가는 글

꿈꾸게 하는 신발을 신고 떠나는 여행 / 신광철

시인 최주식 2010. 1. 28. 22:58

<시평> 한비문학 (2006년 5월호)

 

 

꿈꾸게 하는 신발을 신고 떠나는 여행

 

       

  신발論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마경덕의 시집: '신발론'에서

 

 

 

 늘 신고 다니던 신발을 내버리면서 시 하나, 그것도 월척 하나를 건져 올렸습니다. 큰 기쁨을 만난 기분이지요. 날마다 쓰는 일기 몇 줄이 시가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생각해 보세요. 편안한 마음으로 적은 글이 시가 되는 느낌,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인데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면 더구나 흥분되는 일이지요. 바로 이 시가 가지는 미덕이거든요. 몇 줄의 일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적다가 문득 떠오른 느낌을 아주 소품형식으로 적었는데 형식을 갖춘 시보다 모양새가 났거든요. 그래서 아주 편한 느낌을 주는 시가 되었지요. 그러면서 가볍거나 범상치 않은 것은 시가 보여주는 힘이 뛰어나기 때문이지요. 품격이 있는 시였기 때문이지요.
 읽고 나서 가슴에 감동의 돌덩이 하나가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헌데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을 찾는 일이 지금 제가 할 일이거든요. 같이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받은 느낌이 남달랐습니다.

 

 우선 이 시는 역발상에서 오는 생각의 역전이 기발합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어느 순간 이게 아닌데 하는 적이 있거든요. 이 시의 발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신발을 버리다가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리는 반전은 아하,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하거든요. 그리고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여행중독자이기도 합니다.
 아니라고요, 이번에는 우기지 마세요. 이번에는 제가 맞을 듯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꿈꾸지요. 다만 마음은 굴뚝같은데 현실을 저버리지 못하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장소, 항구를 그리워합니다. 항구에는 떠나기를 기다리는 배가 매어져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묘한 향수와 미지를 그려보지요. 물론 무인도 같은 그런 막연한 고독을 떠올리거나 또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고 싶은 게지요. 그런 상상력을 충족시켜주는 시가 바로 이 시지요.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신발이 배가 되어 나를 내려놓고는 먼 바다로 떠나갑니다. 그것도 나라는 짐을 벗어놓고는 떠나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발에게도 품위를 부여하는 표현인가요. 세상의 더럽고 어두운 곳을 두루 다닐 때 신발을 벗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세요, 없을 겁니다. 나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신은 신발을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지요. 그런 신발이 부속물이 아니라 나를 태우고 세상을 유람한 배로 대우해주니 얼마나 흐뭇한 일입니까. 사람인 나는 선주가 되고 신발은 배가 되었거든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상상력이지요. 세상에 꿈만큼 아름다운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이 시는 기교가 큽니다. 언뜻 보면 기교나 수사가 없는 평이한 문장으로 보입니다. 내용도 그렇습니다. 일기를 쓰다가 떠오른 감상을 배와 비교해서 적은 산문 같다고 언뜻 느껴지거든요. 산문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왔는데도 감동을 주는 것은 커다란 상징과 현실성 있는 비유에서 비롯됩니다.
 자잘한 은유나 직유로서가 아니라 전환의 과정이 기가 막히게 절묘하거든요. 부분으로 전체를 이야기 하는 제유나, 상징으로 시를 이끌어가게 하는 요인인 환유 같은 발상이 독특하다는 이야기지요.
 먼저 말했지만 늘 신고 다니던 신발을 배에 비유해 순간 인생과 동률의 격으로 올린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기발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기라는 소재가 사람을 편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살면서 일기에도 진실을 다 못 적는 것이 사람이긴 합니다.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고 자신하는가 보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솔직히 일기에도 숨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거든요. 물론 저만 그런지도 모르지요.
설령 그렇더라도 일기는 가장 솔직한 기록이고 사람의 인생이란 것도 하루를 보낸, 어쩌면 극히 사소함으로 이루어진 오늘의 퇴적이기에 가볍게 볼 수가 없습니다. 태어나서 날마다 만난 것은 오늘뿐이거든요. 저는 오늘 이외의 어떤 것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마경덕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합니다.
 늘 같은 날을 살면서도 지루해하지 않는 사람은 참 복잡한 동물임에 틀림없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날뿐인 이 세상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같은 날의 반복인 오늘을 반갑고 흥분되게 맞이하는 것은 삶의 의미가 충만할 때 가능한 일이거든요. 헌데 의미부여의 선봉장은 어쩌면 시인인지도 모릅니다. 철학자는 끝없이 분석하고 해부했다가는 다시 종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기보다는 삶의 진리에 가까워지려 하지요. 그런 이유로 얻은 것은 삶을 그리 아름답게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감성과 낭만을 가지고 삶을 보려 합니다. 시인의 삶은 힘이 들지만 시는 향기로운 게지요. 자신의 육체를 태워 세상의 온기가 되는 나무처럼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태워 시를 쓰지요. 그래서 시는 아름답고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픈 영혼이 만들어낸 시가 많은 사람들을 흔들게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겠지요. 사람의 가슴을 태우면 서쪽으로 기울어가며 타는 노을빛이 될지도 모릅니다. 노을은 구름을 태워야 하는 것이지요. 구름이 없는 하늘에 노을이 탈 리가 없지요.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고난이 없는 인생은 노을도 없지요. 추억이 없다는 이야기와 상통할 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받아들이면 따뜻해지거든요. 아니라고요, 가만히 내게 다가온 시련에 대해 귀 기울여 보세요. 조근조근 속삭이는 그 시련의 사유를 들어주다 보면 힘든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되거든요. 정말이에요.
 신발론이라는 시는 바로 이러한 인생에, 고난에 귀 기울이기에 동참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요즘 시는 많이 달라졌지요. 세상이 달라지니 시가 달라졌다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은 늘 그대로인데 시를 쓰는 시인이 각박해진 게지요. 자신만이 세상에서 뒤쳐진 것 같고 자신만이 세상을 힘들게 산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마경덕의 ‘신발론’이란 시도 신춘문예 등단작품입니다. 헌데 신춘문예에 대한 말들이 많거든요. 말은 언제나 있어왔고 비판은 또한 필요하지만 같은 목소리의 비판이 나온다면 진정 고민해 보아야 하거든요.   

   

 신춘시가 한국시를 망치고 있다는 말들을 한다. 좀 심한 소리지만, 근거가 아주 없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최근 4∼5년 동안에 신춘에 뽑힌 시들을 보면 대개 비슷비슷해서, 포즈가 공연히 비장하고 내용이 모호하다.
 또 억지로 만든 자국이 역력하여, 이미지도 상징도 생경할뿐더러 리듬감도 없어, 살아 있는 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산문 형태의 시가 많대서 하는 말만은 아니다. 하긴 내재율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콤마나 피리어드를 무시하는 등 어법을 어김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려는 유치한 시도도 신춘시에서 비롯된 대목이 없지 않다.
 이런 시들을 선자들이 계속 뽑아 놓으니까 좋은 시의 전범처럼 되면서, 신춘 응모시들이 이런 시 일색이 된다. 나아가서 이것이 한국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지는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읽어가면서 매우 지루하고 답답했다. 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작품이 찾아졌다.
 그것이 마경덕의 시들이다. 우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고 힘이 있다. 시를 가지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터득하고 있는 시들이다.


 인용하는 글로 길을 다시 떠나려 합니다.
 윗글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마경덕의 ‘신발론’을 당선작으로 내놓으면서 쓴 신경림 시인의 시평의 한 부분입니다.
  시는 쉬워야한다는 것이 신경림 시인의 지론이지요. 저는 이런 생각을 종종합니다. 모든 시는 공감되지 않으면 시가 되기 전에 산문으로 죽어간다고요. 시가 죽으면 산문이 되는 게지요. 아름다운 산문이 얼마든지 있고 감동을 주는 산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산문시라는 것도 있습니다. 시가 꼭 운율이나 정형성을 가져야한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는 시다운 면모를 보여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이야기하다보면 재미없는 시평이 될 것이지만 우선 꼽고 싶은 시의 덕목은 감동이지요. 더 좋은 시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고요. 이러한 장점을 가지지 못한 글은 아무리 뛰어난 시적 자질을 가졌다 해도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이 먼저 감동하고 독자들도 함께 감동해주는 시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시에 목숨 걸고 사는 사람들을 간혹 봅니다. 정말 치열하게 시에 많은 것을 걸더군요. 어떤 때는 안쓰러운 적도 있습니다. 노력만큼 좋은 시가 안 나오니 하는 말이지요. 세상이 노력만으로 되면 쉽지요. 그렇지 못 하니 말이지요.
  예를 들어 이봉주 선수에게 시론을 가르친다고 소월이나 백석 같은 시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뒤집어 생각해볼까요. 신경림, 고은 같은 분이나 유안진, 신달자 같은 시인에게 마라톤을 가르친다고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람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과 근성이 있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특성을 미리 알고 그 길로 가는 길이 성공의 길이지요. 성공은 한 가지만으로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난 것과 노력이지요. 물론 운도 필요하고요. 운이란 것은 시대를 타고 나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은 확실한 듯합니다.
 마경덕은 이러한 세 가지 중에서 적어도 타고난 것과 노력은 타고 났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시는 탄탄하거든요.
 마경덕의 시는 전통 서정시의 문법을 잘 지키면서 일상 속에서 직접 체험한 경험들을 형상화를 추구하고 있지요. 형상화가 파격적인 것에 매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자와 시인은 한 사람으로 나타나지요. 이 시에서는 그런 마경덕의 특성이 아주 잘 나타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의 특성은 화자와 시인이 일치함으로써 설득력을 가지게 되거든요. 그리고 내 이야기 같기도 해서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도 있지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끌어안으려는 심성이 따뜻하게 다가오지요. 마경덕의 시는 그런 면이 고마운 미덕이지요. 어쩌면 그런 면이 모성적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끌어내 사람들을 꿈꾸게 하는데 동참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알고 나면 개운하고 흐뭇하잖아요.
 마경덕은 아마도 넉넉한 삶을 가진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시에서 그런 면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를 잘 아는 지인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래서 몸을 틀어 하늘로 올라간 골목과 곡절 많은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가 봅니다. 긴장의 힘이 생활 속의 긴장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그의 인생이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인 마경덕은 이번에 첫 시집 <신발론>을 냈습니다. <문학의 전당>이란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는데 반응도 참 좋습니다. 어쩌면 운도 타고 났는지도 모르지요.
 첫 시집에 이만한 성공을 거두기란 쉽지 않거든요. 이 시대에 소소한 일들로 엮여진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감동할 일이 없는 것이 현실이지요. 현실에는 꿈이 끼어들 틈이 적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실망하고는 합니다. 헌데 마경덕 시인은 특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잔잔한 일들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었지요.
 물론 이 시인이 하루아침에 날개를 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닐 겁니다. 새가 날아오르기 위해서 창자의 길이를 줄이고 뼈 속을 비우는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듯이 마경덕 시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삶에 대한 성찰과 고통에 대한 따뜻한 이해 그리고 글쓰기의 전제조건인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쌓여 퇴적된 그 위에 그의 시는 부화하게 되었으리라 싶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것이지요. 아직은 신인인 그의 시는 큰 새가 될 것입니다. 벌써 다르거든요.   
 마경덕은 대상을 객관화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비유적 인식이 정확하게 구사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처럼 든든한 기본기를 기본으로 그의 시는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굳이 흠이라면 늦은 등단이 조금 벅찰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대단한 출발이라기보다 나이 들어서도 ‘성장’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삶이 진정 성공한 삶이라고 저는 주장하는데, 맞지요?

 

 

 

 

 

                                                      신광철 (시인. 소설가) 

 

1957년 진천 출생

1994년 《문학세계》신인상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교류위원,
한비문학 상임고문으로 활동 중
삼오문학상·세계계관시인문학상을 수상

시집《당신이 있어야 할 자리》《사람, 그래도 아름다운 이름》《늑대의 사랑》과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
장편소설 《땅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