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사물, 그리고 젖은 영혼
권경아 (문학평론가)
1
마경덕의 시들은 삶 속에서 접하게 되는 다양한 경험과 사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인은 일상의 경험과 사물들을 섬세한 시적 언어로 그려냄으로써 일상에서 시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 『신발論』은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신발論」)린 어느 날의 단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인은 ‘묵은 신발’을 버린 후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사소한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하여 자신의 살아온 날들과 중첩시킴으로써 ‘묵은 신발’을 ‘막막한 세상’을 항해하는 한 척의 배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은 「오래된 가구」에서도 나타난다. 이십 년 동안 놓여 있던 장롱을 옮기는 과정에서 드러난 비닐장판의 ‘움푹 파인 발자국 네 개’를 보며 시인은 가구의 ‘긁히고 멍든 자국’을 읽어내는 것이다. 시인과 함께 생활한 오랜 시간 속에서 가구는 ‘서서히 기울고’ 또 속살에 많은 상처를 얻게 된 것이다. 시인은 그 동안 무심코 스쳐 지났던 삶의 다양한 경험과 일상의 사물들을 세심한 관찰을 통해 읽어냄으로써 사소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마경덕 시세계의 특징은 이러한 삶의 다양한 경험과 일상의 사물들을 세심한 관찰을 통해 읽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표되는 신작시들에서도 이러한 일상의 시학은 그대로 드러난다. 『신발論』에서 보여준 일상의 풍경은 다양하다. 시장 사람들이 정기휴일을 맞아 친목계를 치르는 모습(「불가마 사우나탕」)이나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던 하루(「날아라 풍선」)를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추를 마구 흔’들며 밥을 짓고 있는 압력솥에 시선이 머물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관찰은 신작시에서 더욱 섬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신발論』의 시세계가 일상을 그리면서도 버려진 것들에 주목함으로써 삶의 쓸쓸함을 그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번 신작시들은 일상을 환하게 그려냄으로써 삶을 경쾌하고 밝게 그리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같은 봄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신발論』에서 그려진 봄과 신작시의 봄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신발論』에서의 봄은 ‘변두리로 떠돌며 한 번도 삶의 주연이 되지 못한 엑스트라’(「마지막 봄」)의 삶과 겹쳐지고, ‘밟고 떠밀고 아우성’(「야만의 봄」)이 가득한 싸움터에서 살아남아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 계절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신작시에서의 봄날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환희의 계절로 그려지고 있다. 즉 이번 신작시들은 마경덕이 『신발論』에서 보여준 일상의 시학이라는 시세계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일면 시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마경덕의 신작시들 중에서 특히 「우물」은 일상의 경험과 사물에 대한 관찰을 주요한 시적 전략으로 사용하던 시인의 시선이 외적 현상이 아닌 내면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2
하동 고하리 장날, 줄줄이 이고 지고 버스에 오릅니다. 때는 봄,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올라 노인의 마른 몸에도 물이 고일 것 같은 날, 장 보고 가는 고무다라 보따리 포대자루 초만원입니다. 매부리코 노총각 윗말 어린 처녀 등에 찰싹 붙어 코를 씰룩거리고 눈을내리 뜬 처녀 귓불이 붉네요. 훌쩍 마흔 넘긴 무지렁이 총각 절구통에 치마만 둘러놔도 거시길 디밀 겁니다. 환장할 봄이거든요. 재첩장사 과부 아지매, 떨이를 못 했는지 어깨가 많이 기울었습니다.
… 중략 …
삼거리 욕쟁이 할매 보따리 챙겨들고 일어서는데. 버스문까지는 첩첩산중, 입심은 여전해 오살헐 놈, 육실헐 놈 출구에 닿기 전 이미 몇 놈은 죽어 넘어졌지요. 성미 급한 어르신 얼른 비키라고 호통이신데. 쉽게 길이 나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며 간신히 내렸는데 아뿔싸! 아랫도리 허전합니다. 노상에서 고쟁이 하나 달랑 걸친 할매, “이놈들아, 치마 내놔라” 일갈에 끈달이 홑치마를 찾느라 또 한번 버스가 우당탕, 옆구리를 비틉니다. 누군가 비린내 묻은 치마를 휙 창 밖으로 던지고 웃음 한 사발 엎질러집니다. 봄은 또 그렇게 스리슬쩍 가파른 고개를 넘어갑니다.
― 「봄날」 부분
이 시는 어느 시골 장날의 풍경을 감각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장날의 풍경을 그리면서 한창 판이 벌어진 장터가 아닌 시골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장이 파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시골 사람들의 귀갓길 풍경을 경쾌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날을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올라 노인네의 마른 몸에도 물이 고일 것 같은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때는 봄인 것이다. ‘환장할 봄’인 것이다.
시인은 충만한 봄기운을 장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모습에서 발견하고 이러한 봄 풍경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동네 노총각과 웃말 처녀의 어색한 대면도, 재첩장사를 하는 과부 아지매의 모습도, 그리고 아랫마을 욕쟁이 할매의 걸찍한 입심까지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장 보고 가는 사람들 밀고 당기고 초만원’인 버스 안이 시끌벅적하듯 이 시는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시인은 장날의 버스 안이라는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하여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오른 ‘환한 봄’을 화려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경쾌한 봄의 정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환한 봄’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버스 안에 가득한 소박한 시골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삶의 모습이 봄날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더불어 만들어 가는 삶을 경쾌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시선. 이번 신작시들과 『신발論』의 시들의 차이가 이 부분에서 드러난다.
『신발論』에 나타나는 삶의 풍경에는 버려진 것들의 슬픔과 쓸쓸함이 배어 있다. 이것은 시인이 비록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다 해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많은 고통과 갈등, 슬픔 등과 같은 삶의 쓸쓸함을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째깍째깍 태엽이 풀리고 낭비된 시간이 베개를 적신다. 복부에 붕대를 두른 사내, 휘파람을 불던 경쾌한 입술은 반쯤 벌어져 불안하고 멍청해 보인다. 페달을 밟던 힘찬 다리는 종일 빈둥거린다. 변두리로 떠돌며 한 번도 삶의 주연이 되지 못한 엑스트라는 단역을 끝내고 곧 무대 뒤로 사라질 것이다. 헐거운 사내가 희미하게 웃는다.
꽃눈이 오네. 선잠을 깬 여자가 커튼을 열었다. 꽃이 눈처럼 날리는, 빌어먹을, 하필… 봄이었다.
― 「마지막 봄」 부분(『신발論』)
「마지막 봄」에서는 삶의 쓸쓸함이 꽃눈이 날리는 화려한 봄날과 대비되며 나타나고 있다. 링거액을 맞으며 암병동에 누워 있는 사내는 죽음에 직면해 있다. ‘휘파람을 불던 경쾌한 입술’과 ‘페달을 밟던 힘찬 다리’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내는 약해진 것이다. 시인은 이제 곧 죽음을 맞게 될 사내와 ‘꽃이 눈처럼 날리는’ 창 밖의 풍경을 대비시킴으로써 삶의 쓸쓸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내의 삶이 쓸쓸한 것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변두리로 떠돌며 한 번도 삶의 주연이 되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사내의 삶을 쓸쓸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도 화려한 삶의 절정을 맞지 못한 사내 앞에 봄날의 절정이 펼쳐지고 있다. 사내와 꽃눈의 먼 거리, 이것이 또한 삶을 쓸쓸하게 하는 것이다.
삶의 쓸쓸함을 인식하던 시인의 시선이 경쾌하고 감각적인 삶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빈궁」에서 잘 나타난다. 시장골목의 보리밥집에서 ‘입심 좋은 동네 아줌마들’이 친목계를 열고 있다. 평소에 장난기가 많은 여주댁은 ‘요즘은 자궁子宮이 없는 여자 아닌 여자를 빈 궁宮이라 부른다’며 작년 가을 혹이 생겨 자궁을 들어낸 마산댁을 보고 ‘빈궁마마’라고 놀린다. 이 말에 동네 아줌마들은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있다. 마산댁에게는 삶의 상처가 되는 이야기로 모두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는 이와 같은 농담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에서 이러한 삶의 상처를 희석시키고 있다. 비록 웃음 끝에 쓸쓸함이 묻어 있었지만 마산댁은 이러한 농담을 ‘어머, 내가 덕분에 빈궁이 되었네’라고 답하고 ‘헛헛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덩달아 웃’음으로써 삶의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 나타나는 마산댁의 웃음은 삶을 밝고 경쾌하게 보려는 시인의 인식이 만들어낸 웃음이라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시선이 긍정적이고 밝아졌다는 것은 양버즘나무 혹은 플라타너스라고 불리는 가로수를 그리고 있는 시들에서 잘 드러난다.
퍽퍽 맨몸으로 허공을 들이받는
저, 저, 가지 끝
짐승 냄새가 난다
나무는 지금
터진 살을 꿰매는 중,
길을 가다가
성난 뿔을 보았다
허공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릴 들었다
― 「3월, 플라타너스」 부분(『신발論』)
플라타너스는 성장이 빠르면서도 공해에 강하고 공기정화능력이 커 가로수로 많이 쓰이고 있는 나무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나무는 줄기가 버짐이 핀 것처럼 얼룩얼룩하다 해서 양버즘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3월, 플라타너스」에서 시인은 온몸에 얼룩버짐이 퍼진 채로 도로변에 일렬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보며 가지 끝에서 ‘짐승 냄새가 난다’고 말하고 있다. 갈라져 얼룩이 진 몸통만 남은 나무에서 살아남으려는 강한 몸부림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맨몸으로 허공을 들이받는’ 나무는 지금 ‘터진 살을 꿰매는 중’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플라타너스의 얼룩버짐을 생존을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으로 인식하고 있다. ‘허공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리’는 바로 살이 터지는 소리이기에 또한 ‘성난 뿔’이 되는 것이다. 「3월, 플라타너스」에서는 살이 터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플라타너스의 삶을 그리고 있다면 신작시 「양버즘나무」에서는 언제나 적자를 보는 헛농사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나무가 등장한다.
한 가마니 그늘이 실려 갔다
그늘만큼 허공도 잘려나갔다
떨어뜨린 그림자를 싣고 버스가 달려가고
청소부는 돗자리만한 그늘을 쓸어 담았다
천 개의 귀를 가진 양버즘나무
찰랑찰랑 목까지 드리운
방울귀고리도 몽땅 잃었다
늘 적자赤字인 나무의 농사법農事法
마디마디 관절이 불거지고
욱신욱신 무릎이 쑤신다
이제 그만 농사를 접으라 해도
고집쟁이 저 여자
놔두면 묵정밭 된다고
그럴 순 없다고
끙, 무릎을 일으킨다
헛농사 짓는 양버즘나무
4월 느지막이
허공에 밭을 간다
― 「양버즘나무」 전문
양버즘나무는 생명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가로수로 심겨지고 또 그 이유로 해서 수없이 가지치기를 당해야만 하는 운명이다. 가로수의 가지치기는 다음 해에 더욱 풍성한 잎이 나게 하기 위한 것이거나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서, 또는 교통표지판이나 신호등, 고압선 등에 접촉되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해진다. 양버즘나무는 겨울이면 무성한 잎들도 다 떨어져 겨울 내내 빈 가지에 둥굴둥굴한 방울 열매를 매달아 놓다가 봄이면 열매도 떨어지고 잔가지들마저 가지치기당하고 만다. 해마다 새파란 잎들을 무성하게 피워내지만 또 잘려지고 마는 것이다. 시인을 이것을 ‘늘 적자인 나무의 농사법’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양버즘나무는 늘 적자를 보는 헛농사이지만 이 헛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둥근 귀고리도 몽땅 잃어버리’고 난 후 ‘4월 느지막이 허공에 밭을’갈기 시작하는 것이다.
삶이 언제나 적자를 보는 헛농사일지라도 양버즘나무는 자신의 삶을 묵묵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이 시에서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양버즘나무와 욱신거리는 무릎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접지 않는 고집쟁이 여자는 비슷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놔두면 묵정밭 된다고 그럴 순 없다고 끙, 무릎을 일으키는’ 여자의 삶은 양버즘나무의 묵묵한 삶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삶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나무에 머문다. 이는 같은 나무를 노래한 「3월, 플라타너스」에서 나무의 생태 중 하나인 얼룩버짐을 ‘터진 살’과 ‘성난 뿔’과 ‘허공에 쩌억 금이 가는 소리’로 바라보며 삶을 고통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시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3
눈물이 다만, 슬프다는 이유만으로 오지 않는 걸 안다.
마른 몸에서 물이 솟는 건 내 몸 어딘가에 우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이다. 흐르는 눈물은 내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이다. 영혼은 고드름이나 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란다. 이것들은 모두 하향성이다. 근원을 향해 생각이 기울어 있다. 내가 나에게 찔리는 것, 슬픔이 파문처럼 번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석순처럼 자란 영혼을 손수건으로 받으면 발간 핏물이 든다. 나는 피 젖은 손수건 석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래된 손수건을 차곡차곡 접어 냉동실에 두었다. 꽁꽁 얼어붙은 냉동고의 영혼들은 더 많은 우물을 만들고 영혼을 생산한다. 고드름처럼 자라 맹물처럼 날아가 버린, 그것들은 대개 일회용이다. 나는 쉰밥처럼 변해버린 가벼운 영혼에 대해 속눈썹이 떨리도록 생각해본 적은 없다.
찌르고 들쑤시고 사막처럼 메마르게 할지라도, 젖은 영혼을 사랑한다. 상처 많은 이 우물에서 詩를 꺼내고 밥을 꺼낸다. 두레박이 첨벙 떨어지는,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 내 머리칼이 쉬이 자라는 것도 질척한 슬픔에 뿌리가 닿아 있기 때문이다. 눈물이 다만 슬픔만으로 오지 않는 걸 이제는 안다.
― 「우물」 전문
마경덕의 첫 시집 『신발論』과 이번의 신작시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삶 속에서 접하게 되는 일상의 다양한 경험과 사물들을 섬세한 관찰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경덕 시의 특징은 신작시 「우물」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적 대상이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나 사물에서 시인의 내면 세계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과 시적 감수성이 그 동안은 주로 현실의 외부에서 비롯되었다면 「우물」에서는 시인의 내면 세계를 주목하는 것이다. 시적 대상이 현실의 외부 현상이 아닌 자아의 내면 세계로 옮아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신발論』에 수록된 「우물이 입을 연다」에서 시인은 창경궁 뒤뜰에 있는 오래된 우물을 보며 우물 속에 묻혀 있는 ‘몇 권의 슬픔’을 읽어내고 있다. 현실의 구체적인 사물인 우물에서 ‘수백 년을 탕진한’ 우물의 깊은 슬픔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물」에서 나타나는 우물은 현실의 우물이 아니다. 그 우물은 ‘내 몸 어딘가에’ 자리하여 ‘마른 몸에서 물이 솟’게 하는 우물인 것이다. ‘그 깊은 곳에 영혼이 물처럼 고여 있’다. 시인이 흘리는 눈물은 이 영혼의 우물에서 솟아나는 ‘영혼의 하얀 이마이거나 지친 발가락이거나 슬픔에 퉁퉁 불은 손가락’으로 영혼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내면 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영혼은 근원을 향해 기울어 있으므로 모두 ‘하향성’의 특성을 지닌다. 시인의 슬픔은 하향성의 영혼이 내면을 깊이 찌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우물」의 슬픔이 「우물이 입을 연다」에서 나타나는 슬픔보다 한층 더 깊고 아픈 것은 「우물」의 슬픔이 시인의 내면에서 석순처럼 자라나 ‘발간 핏물’이 나도록 스스로를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영혼을 더 많이 생산하고 있다. 그것은 ‘찌르고 들쑤시고 사막처럼 메마르게 할지라도’ 상처 많은 영혼의 우물이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은 ‘상처 많은 이 우물에서 詩를 꺼내고 밥을 꺼내’고 있는 것이다. ‘서늘히 두렵고 캄캄한 우물’. ‘질척한 슬픔’이 고여 있는 영혼의 우물. 이 내면 속 영혼의 우물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또 시인의 시세계를 깊게 하고 있다.
시인의 시선이 일상적 경험이나 사물에서 내면으로 움직이고 있는 변화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마경덕의 시세계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젖은 영혼’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로 여는 세상 (2006년 여름호)
권경아 (평론가)
한양대 국문과및 동대학원 졸
2003년 <시와세계> 평론으로 등단
'♣ 詩그리고詩 > 쉬어가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동범 시인의 첫시집 (0) | 2010.01.28 |
---|---|
권현형 시집 <밥이나 먹자, 꽃아> (0) | 2010.01.28 |
꿈꾸게 하는 신발을 신고 떠나는 여행 / 신광철 (0) | 2010.01.28 |
사람은 천사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다. (0) | 2010.01.08 |
법정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중에서 (0) | 2010.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