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박후기
말뚝 앞에 무릎 꿇은 소처럼,
재개발지구 빈집 한 채
전신주에 몸 묶인 채
순하게 앉아 있다
ㅅ자 슬레이트 지붕
길마*처럼 걸치고
자꾸 미끄러져 내리는 늙은
호박 넌출 가까스로
추켜올리고 있다
벽마다 균열이 뿌리 내리고,
문이란 문 모두 열어젖힌 채
깊은 한숨 쉬는 이 집의
마지막 주인은 죽음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손님처럼 왔다 갈 뿐,
죽음만이 주소지를 옮기지 않는다
꽃피는 봄이 오면
무너진 무덤 위에서,
붕붕거리며 벌들의
삽질이 시작될 것이다
흙먼지 꽃가루처럼 날리며
아파트가
벌집처럼 들어설 것이다.
* 짐을 싣기 위해 소의 등에 안장처럼 얹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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