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장편소설|문학동네|252쪽|1만원
열여섯 살 소녀 누경이 스무 살 연상의 재종(再從) 오빠 서강주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누경은 서강주와 '연인'이 된다. '인간은 누구도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보편적 존재 질서를 확인하는 전경린의 서사 전략은 이처럼 '친척인 동시에 유부남인 남자와의 사랑'이라는 이중의 금기를 통해 불편한 방식으로 제시된다.
금지된 사랑을 꿈꾸던 누경은 서강주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들어가 사랑을 이루려고 한다. 서강주 역시 6촌 여동생을 사랑할 수 없다는 자명한 현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누경에게 끌린다. 누경은 감정 앞에 솔직하고 싶다. "난, 적어도 내 진실은 감당하며 살고 싶어요. 누구나 인간은 자신의 진실을 감당할 능력이 있을 테죠." 강주가 고개를 젓는다. "현실에서의 인간은 겨우 인간답게 살아내고 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하는 거다."(146~147쪽)
윤리와 감정 사이의 충돌은 이문열의 장편 《레테의 연가》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레테…》가 윤리적 상대주의를 거부하는 방향을 택한 반면 이 작품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에 빠져버린 여자의 미묘한 심리 상태를 세밀한 풍경화로 보여준다. 해외 출장을 떠나는 강주에게 25인치 허리 사이즈의 치마를 사달라고 하는 누경의 위악은 당혹스럽긴 하지만 곁눈질을 해서라도 보고 싶은 인간의 벌거벗은 초상이다. 그 풍경은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을 처음 접한 19세기 프랑스인들이 곁눈질로 훔쳐보려 했던 나체처럼 위험한 끌림으로 다가온다.
전경린 특유의 정제되고 절묘한 어휘 선택도 감상 포인트다. 강주를 향한 사랑을 거부당한 누경은 자신에게 순정을 바치는 기현을 한사코 거부함으로써 좌절감을 암세포처럼 전이시킨다. 누경은 그런 자신의 태도를 '사랑의 결벽성과 잔인성'(219쪽)이라고 진저리치며 인정한다. 사랑이란 관계 틀 안에서 인간의 감정을 엿보고 싶은 독자에게 권한다.
'♣ 詩그리고詩 > 쉬어가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 뛰어넘고자 논쟁 펼친 '사상의 향연' (0) | 2010.01.31 |
---|---|
책 읽는 요즘 직장인 (0) | 2010.01.31 |
세상의 혼: 시간을 말하다 (0) | 2010.01.31 |
『그대, 청춘』 外 (0) | 2010.01.31 |
선비 화가 공재 윤두서의 삶과 예술세계 (0) | 2010.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