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아름다웠던 제 인생, 이제 명예롭습니다

시인 최주식 2010. 1. 31. 19:39

[ESSAY] 아름다웠던 제 인생, 이제 명예롭습니다

  • 배한성 · 성우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인생은 아름답다고 믿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1년 다녔던 商高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는다.
진실로 인생은 아름답고 명예롭다.

40여년 성우 생활 중 얼마나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을까. 2만여명쯤 됐다. 그 많은 인물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나 자신처럼 느껴진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는 하루 종일 영화 속에서 산다. 내 어린 시절이 그랬다. 열 살 때쯤 서울 중구 인현동에 살았다. 시장 동네라서 어른들은 가게 일에 바빴고 아이들은 방목된 양들처럼 거리를 방황했다. 국도·명보·수도(전 스카라극장)·단성사까지 극장이 많은 동네다 보니 아이들은 곧잘 담을 넘어들어가 영화를 보곤 했다.

어느 날 좀 멀리 계림극장까지 갔는데 나만 붙들렸다. 간판 그리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곳 아저씨가 색의 삼원색이 뭐냐기에 "빨·파·노"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이마에 빨·파·노 페인트칠을 했다.

이런 위험이 있었지만 극장에 숨어드는 데 성공만 하면 '촤르르르'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에 스크린을 비추는 긴 불빛이 신비했다. 극장은 내 호기심의 천국이었고 상상·공상의 시네마 공간이었다. 영화가 끝나면 주인공의 목소리, 표정,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영화배우가 되길 꿈꿨다.

그러나 이사를 가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학교 선생님을 지냈던 어머니는 공주처럼 지낸 분이라 생활 능력이 없었다. 서울대를 나온 아버지는 6·25때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집은 풍비박산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중학교에 1등으로 합격했다.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 답사를 하게 됐다. 밥상에 뜬금없이 인절미 세개와 물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어머니가 첫 등교 날 빈속으로 보낼 수 없어 돈을 꾸어 떡을 사신 것 같았다. 동생이 웬 떡이냐며 집어 먹으려다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답사를 하려면 배에 힘이 있어야 한다. 이건 형 거다."

인절미 한개와 물을 많이 마시고 학교로 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눈물이 났다. 울면서 가장(家長)이 되기로 결심도 했다.

일러스트=양인성 기자 in77@chosun.com
어머니는 '땟거리'가 없는데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진 않는다며 동생과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주인댁에서 쌀을 꾸고 옆방에서 연탄 빌려 쓰는 것도 한계가 왔다. 그 무렵 새벽 신문배달 보조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자명종 시계가 없어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집이 약수터 가는 길에 있어서 통금이 끝나는 새벽 4시면 동네 분들의 두런두런 말소리를 들렸다. 그게 자명종이었다.

그해 겨울 밤 거친 바람 소리에 퍼뜩 잠을 깼다. 사람들 말소리가 안 들렸지만 서둘러 신문 배달하러 나갔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는데 "이놈 잡았다"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튀어나와 나를 마구 때렸다. 도둑으로 오인한 모양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신문배달 학생이라고 소리쳐 겨우 풀려났다. 잠시 후 파출소 앞을 지나다 또 잡혔다. 알고 보니 아직 통금이 끝나지 않은 새벽 두시였다. 경찰들이 나를 숙직실에 재워줬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겹쳐져 떠오른다. 주인공 귀도는 홀로코스트의 위기 속에서도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믿는다. 꿈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지켜낼 길은 그것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가족도 다를 게 없었다.

신문을 배달하면서 한 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합격했다. 당시 가난한 집 아이들의 꿈은 상고나 공고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졸업과 함께 취직하고 야간 대학을 다니면 가난도 벗어나고 사회적인 성공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릴 때 도끼질을 하다 오른손 검지를 다쳤다. 검지 손가락 끝이 혹을 붙인 것처럼 오른쪽으로 뭉툭 튀어나왔다. 주판을 놓을 때면 그 부분이 옆의 주판알을 건드렸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20~30점밖에 되지 않았다. 상고에서 주산 실력이 나쁘면 은행 취직은 거의 안 되는 시절이었다. 신문 배달을 하다 보니 학교 지각도 잦았고 등록금 마련도 힘들었다. 1년여 만에 학교를 포기하고 대안학교로 가야 했다.

한동안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절망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당신의 무능을 탓하면서도 "넌 팔자에 귀인(貴人)이 많단다. 잘 될 테니 기다려보자"고 했다. 중학교 동창 한명이 나의 귀인일 줄이야. 그 친구가 돈 많은 제 외삼촌에게서 돈을 빌려와 나를 대학에 보내주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의 목소리를 녹음했었다. 키팅은 오래된 관습과 모순,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힘을 키워주는 선생님이었다. 학생의 열정과 재능의 불꽃이 마구 타오르도록 부추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선생님을 한 예술대학 방송과에서 만났다. 그 교수님은 영화나 라디오 연속극을 들으며 흉내나 내던 나를 혹독하게 공부시켰다. 나의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1966년 성우 시험 합격으로 찾아왔다.

얼마 전 상고를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오는 2월 5일 졸업식장에서 나를 만나자고 연락해 왔다. 선후배들의 성원과 교장 선생님 그리고 교직원 분들의 응원으로 내가 명예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나의 지금까지 인생은 아름다웠고 이제 명예로워졌다고 생각했다. 치열하게 살려고 애쓰지만 꿈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명예 졸업장을 받고 싶다. 삶은 절망만 계속되지 않는다. 진실로 인생은 아름답고 명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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