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의 여름에세이 / 장독대의 풍경
여인들 애환 가득 서린 곳
울긋불긋 꽃울타리 아른
장독대는 초가집이건 기와집이건 부엌 뒷문으로 통하는 집 뒤쪽에 있기 마련이었다. 명당 풍수설을 긴요하게 여겨서인지, 모든 집들은 대개 뒤로는 뒷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내(河川)가 바라보이는 곳에 앉아 있기 마련이었다. 집의 뒤란에는 대밭이 있어서 대나무 사이사이로 비비새가 지저귀고, 대밭 바로 그 아래 한 쪽에는 장독대가 있어서 크고 작은 독들이 올망졸망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 장독대를 만드는 일이야 남자들이 하지만, 그 장독대를 이용하는 이는 여인들의 몫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주로 사용하지만, 때로는 누이동생도 어른들 심부름으로 부리나케 오르내리곤 하였다. 장독대란 장독을 놓을 수 있도록 땅바닥보다 좀 높게 만든 대(臺)를 말하는데, 어머니는 그 주변에 봉선화와 채송화, 맨드라미, 해바라기 등을 심는가 하면, 도라지나 돈나물 등을 심어서 채취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장독대 주변뿐만 아니라 앞쪽의 개나리 생울타리 주변으로도 심었는데, 그게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분홍 빨강 주홍 보라 하양 등의 꽃이 색색으로 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름마다 분홍 빨강 주홍 보라 하양 등의 꽃이 피는 봉선화뿐 아니라, 빨강 노랑 하양 등의 꽃이 피는 채송화, 닭 볏모양의 꽃이 빨강 노랑 하양 등 여러 가지 빛깔로 피는 맨드라미 등으로 장독대 주변은 총천연색 무대가 펼쳐지기 마련이었다. 맨드라미는 계관초(鷄冠草)라 하지만 맨드라미꽃은 계관화(鷄冠花)라 했다.
봉선화(鳳仙花) 하면, 우선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고 하는, 노래부터 떠오른다. 이 노래를 가리켜 '한국의 영가'라고 한다. 흑인 노예들이 목화를 재배하면서 '흑인영가'를 불렀던 것처럼, 우리 겨레는 일제의 질곡에서 '봉선화'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물 속의 햇살로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몸짓이었다.
요즈음 도시의 아파트촌에서는 장독이 처치곤란이라 수난을 겪고 있다. 성한 독을 망치로 깨뜨려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여인은 들고있던 망치로 항아리 옆구리를 세차게 내려치자 할머니와 어머니의 한이 소름끼치는 비명으로 섞여 나왔다고 했다. 밤새 내린 하얀 눈을 밟으며 장을 뜨러 가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행주에 물을 적셔가며 독을 닦던 어머니의 손끝이 떨리는가 하면 이미 깨져버린 독의 잔해 속에 여인들의 정한(情恨)이 꿈틀거린다고도 했다.
<시인.선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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