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달이 떠있는 때만이 수줍게 피어나
시들면 여인처럼 안쓰러워
산사의 여름밤은 달맞이꽃으로 피어난다. 하얀 소복의 자태로 달이 뜨는 저녁에 피었다가 이튿날 아침까지 밤새도록 팔을 벌리고 서서 정신없이 달을 바라보는 달맞이꽃…. 그 꽃이 없다면 산사의 밤은 무덤 같은 적막에 잠기고 말 것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 때부터 그 하얀 꽃은 시나브로 수줍게 피어난다. 그러다가 모두들 잠이 들고 밤이 이슥해지면 꽃잎은 중천에 떠오른 달을 향하여 사모의 눈빛을 반짝인다.
동산에 떠오른 달이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그 달이 움직이는 대로 우러러보는 달맞이꽃, 그 꽃의 생명은 오로지 달이 떠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숙명적으로 달밤과 더불어 존재하는 그는 달빛이 흐르는 아름다운 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참고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그가 참고 기다려온 날에 비하여 꽃을 피우는 것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그러므로 그는 짧은 여름밤을 일생으로 누려야 한다.
비가 오거나 구름 낀 장마철에는 아예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시들고 만다. 운이 좋아서 꽃을 피우는 밤이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나 달은 먼 곳에 있다.
멀리 있는 달을 그리워하며 정신없이 바라만 보다가 져버리는 달맞이꽃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여인,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은 사라져버렸고, 그 먼 곳에 있는 임을 먼 빛으로 바라만 보는 여인, 그러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이튿날 아침에 말라 오므라지는 달맞이꽃처럼 시들고 마는 여인….
달맞이꽃을 보게 되면 그처럼 쓸쓸한 여인을 생각하게 된다. 안쓰러운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저만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그 환상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환상 속에서 사는 달맞이꽃이 밤새도록 달님만을 향하여 정신없이 사모의 정을 보내고 있을 때 풍뎅이라는 놈은 안하무인격으로 그 꽃잎에 나뒹굴면서 환락을 일삼는다.
풍뎅이라는 놈은 달맞이꽃이 자기에게 웃음을 파는 줄 알고 그 둔중한 몸뚱아리로 별별 발광을 다 떠는데, 잘생긴 꽃의 이상과 못생긴 풍뎅이의 현실 사이에 나타난 괴리, 이것 이상의 비극은 없다.
우리 사회에도 풍뎅이 같은 놈들이 얼마든지 있다. 사랑에 실패하고 돈에 속은 여인들…. 그런 여인들이 환락가에서 술과 정염에 취하는 밤이면 짓궂은 풍뎅이들은 그 꽃을 마구 짓이겨 놓는다. 풍뎅이에게 짓이김을 당하는 달맞이꽃의 하룻밤 풋사랑, 그녀는 도시의 빌딩 위에 떠있는 달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 날이 새면 시드는 달맞이꽃, 불쌍하고 안쓰러운 달맞이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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