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문의 여름에세이
잿물 빨래
요즈음은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빨거나 드라이클리닝 업소에 주어서 해결하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빨래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이타이''라는 분말을 세탁기 물에 풀고 돌리면 그만이지만, 옛날에는 편리한 분말비누는커녕 돌덩이 같은 세탁비누도 흔치 않았다.
그당시 비누 만드는 과정을 보면, 쌀겨에 양잿물을 넣고 물에 풀어서 열을 가한 다음 삽으로 뒤적이고 장화 신은 발로 짓이겨서 비누 형태로 자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당시에는 이러한 비누조차 구하기 힘들어서 시골에서는 잿물 빨래를 하는 경우가 흔했다.
잿물이란 재를 물로 밭아서 우려낸 물을 말한다. 잿물 내리는 데 쓰는 시루에다 콩깍지나 풋나무 따위의 재를 안치고 물을 부어 잿물이 시루 구멍으로 흐르게 하여 그 물로 빨래를 하는 것이었다.
김정한의 소설 ''인간단지''를 보면, 시어머니가 나환자인 시할아버지 수발을 하는 며느리에게 빨랫비누를 주지 않고 잿물 빨래를 하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석 시중, 약 시중에, 하다못해 세숫물 시중까지 복돌이가 죄다 해야만 했다. 게다가 사흘들이 벗어내 놓는 진물이 불그스레한 빨래! 시어머니는 노상 빨랫비누를 숨겨놓고 혼자서만 쓰기 때문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복돌이는 잿물을 밭아서 빨아야만 했다. 그런 날은 속이 메스꺼워 밥도 잘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중만 해도 어느덧 십 년이 가까웠다. 그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드디어 자기만 저 문둥병이 오르고 말았다. 그 푼더분하던 얼굴이 고역에 마를 대로 마르다가 마침내 부석부석 붓기 시작하고 별안간 눈알이 흐물흐물 눈물에 떴다."
이처럼 잿물 빨래는 독한 고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계간 문학지 ''문학사계''에 실린 ''2002, 올해의 좋은 시'' 중 최문자 시인의 시 ''눈물''은 ''잿물 빨래''의 슬픔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난을 통한 인생의 빨래를 얘기하고 있어 읽기를 권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이불 빨래하는 날은/ 뒷마당에서 잿물을 내렸다./ 금이 간 헌 시루 밑에서 뚝뚝 떨어진/ 재의 신음소리/ 꼭 독한 년 눈물이네./ 열 아홉에 혼자된 외할머니 독한 잿물에/ 덮고 자던 유년의 얼룩들은 한없이 환해지면서/ 뒷마당 가득 흰 빨래로 펄럭였다./ 하나님은 내가 재가 되기를 기다렸다./ 하루종일 재가 되고 났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뭐가 있을까? 하여/ 쇠꼬챙이로 뒤적거리며 나를 파보고 있었을 때/ 재도 눈물을 흘렸다./ 어제의 재에다/ 새로 재가 될 오늘까지 얹고/ 독한 잿물을 흘렸다./ 조금도 적시기 싫었던 사랑까지/ 한없이 하얘져서/ 세상 뒷마당에 허옇게 널려 있다./ 재는 가끔 꿈틀거렸다./ 독한 눈물을 닦기 위하여.
시인. 선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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