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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외 1편 / 양애경

시인 최주식 2010. 1. 31. 19:54

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외 1편 / 양애경

 


때밀이 아줌마는 때를 밀고 있지 않을 때도

금방 눈에 뜨인다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 속에서

검거나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안 쓰는 대야를 걷어다 한쪽에 치우고 있거나

좁은 침대에 벗은 여자를 누이고

땀을 흘리며 문지르고 있을 때도

때밀이 아줌마는 다른 여자들과 어딘지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때를 밀게 하는 여자들이 더 눈에 뜨였다

만삭의 임산부나

시들어 조그매진 할머니가 누워 있으면 마음이 놓였지만

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왜소한 때밀이 아줌마에게 살집 피둥한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게으르기도 해라. 제 몸의 때도 제 손으로 못 미나.'


살짝 끓는 물에 튀겨져 털을 밀고 있는 하얀 돼지 같기도 하고

잔돈푼에 노예를 산 거만한 마나님 같기도 하고

게다가 요구르트에 우유에 퍼런 오이 간 것에…

초라한 동네 목욕탕에서 몸에 범벅을 하고 있는 여자가

대저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이제 나도 나이가 먹었나

때밀이 아줌마에게 신경이 쓰인다

집집마다 샤워 시설이 되어 목욕탕 손님이 줄어서 그런지

때를 밀고 있을 때보다는

느릿느릿 손님들이 쓰다 놓고 간 대야를 걷고 있거나

대기실 체중계 앞에 앉아 잡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많다

목욕을 늘 혼자 가는 내가

아이들을 둘 달고 와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등 밀어 드려요?" 하니

그녀 등을 돌려대며 혼잣말처럼

"아줌마한테 등만 밀어달라고 할려고 했는데…" 하는데,

마음이 뜨끔하여 때밀이 아줌마를 힐끔 봤다


'오늘도 난 저 아줌마 일을 빼앗은 게 되었네', 하고.

 

 

버진 팁 / 양애경

새 화장품 뚜껑을 열면
입구에 얇은 알루미늄 껍질이 달려 있지
그것을 잡아당겨 뽕! 떼면
그제서야 크림을 짤 수 있지
그걸 버진 팁(virgin tip)이라고 한다
새 제품의, 그러니까,
처녀막

처녀막을 잃으면 시집을 못 간다고,
테스는 딱 한 번의 일로 임신까지 해서
아이를 낳고, 잃고…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는데
첫날 밤 예전 일이 들통나 버림받고
결국은 살인범이 되어 사형대에 올랐으니
아이고, 처녀막…

남자에게 손목만 잡혀도 큰일나는 줄 알았고
꿈속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도 순결을 잃을까봐 놀라 깼다
불과 20년 후 세상이 어찌 변할지도 모르고 

하긴 누구라서 새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온전한 내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새로 정들인 내 것,
내 손길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내 것
아무에게나 꼬리치는 애완견보다
주인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만한 개가 주인에겐 더 예쁜 것처럼

버진 팁,
여자들도 누군가의 동정을 떼어주고 싶다
동정을 떼어주고
평생 다른 여자 손길 타지 않게 지키고 싶다

하지만
누구든지
제품 취급당하는 건 싫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