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밭에서 / 권태하
몇 년 전에 헌집을 헐고 그 자리에 3층으로 다가구 주택을 올리면서 옥탑에 두 평 남짓한 밭을 하나 만들었다. 옥탑 콘크리트 바닥에 못쓰는 비닐장판을 깔은 후에 공사장에 가서 흙을 얻어 져 올리고 집 지을 때 남은 벽돌로 테두리를 둘렀더니 제법 그럴듯한 네모난 밭이 만들어 졌다.
처음에는 흙이 새 흙이어서 그랬는지 잡초가 무성하여 애를 먹이더니 한의원에서 한약 찌꺼기를 얻어다 쏟아 붓고 또 주방에서 나오는 음식 쓰레기를 발효시켜 퇴비로 주었더니 다음해부터는 소출이 제법 쏠쏠하여 여름 내내 싱싱한 무공해 채소를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봄이 오면서부터 우리부부의 하루 일과의 시작은 항상 옥탑 밭일이었다. 씨를 뿌린 후 싹이 나고 잎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땅의 소중함을 생각하기도 하고, 물을 주면서 비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깨닫기도 했다.
작년 여름에 상추 한 포기에서 받은 씨앗이 밭 전체를 상추밭으로 만들고도 남아 이웃에게 나눠주고, 고추 한 알에서 나온 씨앗이 수십 그루의 고추로 자라나 수백 개, 수천 개의 고추를 달고 나오는 것을 보노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옥탑 밭이 있어 좋은 것은 아침마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며 아내와 옥탑 밭에서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결혼을 하여 나가 살면서 빈방이 많다보니 아내가 걸핏하면 딴 방에서 잠을 자는 편이어서 옥탑 밭의 만남조차 없다면 밥상에서나 얘기를 할까 전혀 얘기할 틈이 없었는데 옥탑 밭을 만들고 나서부터는 아내와의 대화가 부쩍 잦아졌다.
아내 쪽에서도 그 재미를 느꼈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어느새 옥탑 밭에 올라가 채소를 솎거나 물을 주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술 좀 작작 해요. 당신 얼굴색이 요즘 들어서 시커멓게 탔잖아요? 간에 이상이 왔다는 신호라 하든데.." 라고 한다든가
"깜빡 했네, 내일 모레가 할아버님 제삿날이래요. 기억해 둬요" 라는 말도 옥탑 밭에서 들으면 신통하게도 내 귀에 거슬리지도 않았고 또한 귀에 잘 들어오기도 했다.
오늘 아침 일이다. 아내가 그릇을 들고 풋고추를 따는 것을 보면서 내가 말을 붙였다.
"여보. 나 오늘부터 당신 곁에 바짝 붙어서 잠을 자야겠어"
"이 양반이, 아침부터 뭘 못 볼 것을 봤나, 별 소릴 다 하네. 왜 그래요?"
"글세 당신 이걸 좀 보라고. 이 호박 말이야. 이게 이렇게 그만 맥없이 떨어져 버렸잖아"
나는 열매를 못 맺고 떨어진 조그만 새끼호박 한 알을 아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 호박은 얼마 전에 노런 암꽃을 머리에 얹고 호박 줄기에 싱싱하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호박넝쿨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직 수꽃이 하나도 핀 것이 없었다. 혹시 이웃집 옥탑 밭에 호박꽃이 피어있나 살펴보았지만 옆집 옥탑에도 호박을 심긴 했지만 아직 꽃은 보이지 않았다.
"저 암꽃이 정받이를 하지 못하면 결국 열매는 떨어지고 말텐데, 저걸 어쩌지?"하며 혼자 안달을 했지만 결국 수꽃 꽃가루를 받지 못한 암꽃이 며칠 후에 시들시들해 지더니 어젯밤에 그 호박이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이걸 어쩌라고 날 줘요? 버리면 되지"
"야, 이 둔한 사람아. 그게 왜 떨어졌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야"
하지만 아내는 역시 둔했다.
"생각할 것도 많네. 제가 살 힘이 없으니까 떨어진 거지.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다고?"하며 그 새끼호박을 멀리 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수꽃 꽃가루를 못 받아서 그리 된 거야. 뭘 좀 알고 있으라고"
"아이구, 대단한 걸 아셨구려. 아주 그 방면으로 논문을 내시지 그래요"
아내와 나는 한참 웃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 금강산에 갔을 때 일이 생각났다. 온정각 뒤편으로 게르마늄 온천이 있었는데 안내자의 말이 설봉호가 들어올 때마다 온천 욕탕이 자리바꿈을 한다는 것이었다. 남탕으로 쓰던 욕탕이 다음 번 항차에 관광객이 올 때는 여탕이 되고 여탕으로 쓰던 욕탕은 남탕으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남탕을 계속 남탕으로만 쓰면 묘한 냄새가 나고, 또 여탕을 여탕으로만 쓰면 묘한 냄새가 나는데 3일 만에 한번씩 자리바꿈을 하면 신통하게도 아무 냄새가 안 난다는 것이었다. 홀아비가 사는 방에 들어가면 홀아비 냄새가 나고 과부가 사는 방에 들어가면 과부 냄새가 나지만 부부가 거처하는 방에 들어가면 잡 냄새가 없는 이치와 같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음양의 조화란 것이 참으로 오묘한 것이라 했다.
옥탑 밭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에게는 사랑의 밭이나 다름없다. 봄에 실파, 여름엔 상추와 고추, 가을에는 김장배추를 키워서 먹고 또 사랑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이 옥탑 밭이야 말로 우리 부부에게는 기가 막힌 사랑 밭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대문문학' (2005년 6호)
권태하 (수필가. 극작가 )
경북 영주출신
연세대학교 국문과졸업
1979년 MBC-TV 개국 10주년 기념 TV 드라마 당선
1993년 <월간중앙>창간 25주년 기념 일천만원고료 논픽션 당선
소설 - 그들은 나를 칼리만탄의 왕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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