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쓰레빠 / 정익진
슬리퍼, 왠지 쫄딱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것 봐,껌 짝짝 씹으며, 두 손 청바지 앞주머니에
팍, 찔러 넣고 삐딱하게, ‘에이 제기랄’ 하는 표정으로
쓰레빠 질질 끌고, 기산비치상가 앞을 지나는군,
저 자식이 앞으로 커서 뭐가 되려나?
너 도대체, 어딜 그렇게 쏘다니냐?
중학교 다닐 적, 수학 선생님에게 숙제 안 해왔다고
쓰레빠로 뺨도 맞아봤어. 에이, 재수 없는 그놈의 쓰레빠
퉤, 퉤,
쓰레빠, 확실히 방정맞고 불량스러워.
슬리퍼라고 말을 바꾸어 봐도, 본질적으로 재수 없군.
근데 말이다. 일요일 새벽까지, 술 마시고,
조금만 자다, 목욕탕 가려고 겨우겨우 일어나,
어질어질, 운동화조차 제대로 신을 수 없을 때,
그때, 그놈의 쓰레빠가 그리 반가울 수가
해수탕을 나와 바닷바람 한 번 쐬고
송도초등학교 근처 오뎅집, ‘아! 그집’을 향해
슬리퍼 끌고 올 때의 아! 그 상쾌함이란
펑키젤리 슈즈다, 아쿠아 샌들이다 뭐다
유행이라지만, 역시 슬리퍼 신고 소똥에 미끄러진
표정을 지으며 ‘쓰레빠를 질질 끌고’가야
그게 제 맛이야.
시집 <윗몸일으키기> 2008. 북인
귀들 / 정익진
두구동 연꽃지, 못 속에는 코끼리들이 산다
비바람 토닥이는 저 깊은 수면 위로,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귀를 펄럭이는 코끼리들이여
귀들이 가려우신가
8월하고, 코끼리의 귀에서 터지는 하얀, 붉은 연꽃들
저놈들, 저놈들, 언제 걸어나오기만 해봐라
소류지의 여름밤
귀에 불 밝힌, 코끼리들의 기나 긴 행렬
연꽃, 연꽃,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몹시도 뒤로 제쳐진 나의
두 귀
시집 <윗몸일으키기> 2008.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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