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윗몸일으키기 외 1편 / 정익진

시인 최주식 2010. 2. 3. 22:16

윗몸일으키기 외 1편 / 정익진

―헬스클럽

 

 

열, 열다섯, 스물, 스물다섯 서른…

내가 윗몸을 일으키는 동안

청소일 하시는 아주머니 마룻바닥 위를

무릎으로 걸으며 걸레질하신다

 

마흔아홉, 쉰… 부들, 부들, 지느러미를 떨며

후우! 마침내 수면 위로 윗몸 일으켜 솟아오르는 동안

아주머니도 걸레질을 멈추고 허리를 편다            

 

나야 복부에 왕자라도 새긴다지만

아주머니는 바닥에 엎드려 무슨 근육을 키우시려는가

 

나야 윗몸을 일으켜 지구본이라도 돌릴 수가 있겠다지만

병실에 누워 거동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침대 옆구리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야

윗몸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이다

 

정사각형이 윗몸을 일으키면 정삼각형이 되고

링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기 위해선

윗몸부터 먼저 일으켜야 한다

 

쉰하나, 쉰둘…

책 속의 문장들 몸을 일으켜 책이 펴지고

씨앗들은 깨어나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오랜 시간 바닥에 누웠던 빛들이 일제히

일어나 행진할 시간이다

 


따분한 저격수 / 정익진


리모컨을 누르고, 담배를 비벼 끈다.
왼쪽 손목을 돌려 총을 꺼낸다.
총구를 베란다 밖으로 내민다.
장전해두었던 한 발을 쏜다.
203동에서 나온 그 남자, 머리를
여러 개로 떨어뜨리며 쓰러진다.
총을 목구멍 속에 숨기고
계속 신문을 본다.

 

여전히 하얀 구름, 푸른 하늘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목구멍 속에 넣어두었던 총을
꺼낸다. 자전거를 타는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늠쇠를 고정시킨다. 방아쇠를 당긴다.
휘청거리는 자전거, 곧 쓰러진다.
총구를 입 안으로 구겨 넣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 한 사람 나를 의심하는 사람 없다.
고백을 해보았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다시, 나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고 총을 토해낸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날아온 새 한 마리
내 복부를 뚫고, 다시 얼굴을 뚫고
통과해보지만 나는 쓰러지지 않는다.
무작정, 쓰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쓰러지지도 않는 따분한 삶이다.


 시집<윗몸일으키기> 2008.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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