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숨막힘 / 김기택
조심조심 노인이 걷고 있다.
눈앞에서 널찍하고 평평하던 길이
발밑에서 외줄처럼 흔들리며 좁아지는 걸음을 걷고 있다.
구겨질까봐 슬금슬금 양복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최대한 작고 곱게 만든 걸음을 걷고 있다.
중간에 있는 관절 하나만 툭 건드려도
뼈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살살 달래가며 걷고 있다.
고개 들어 두리번거리면 길이 흔들리고 중심이 무너질까봐
갈비뼈 위에 단단하게 고정시킨 목 대신
눈알만 가만가만 돌아가는 걸음을 걷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일으키는 모든 진동을
숨막히도록 가는 숨소리로 흡수하며 걷고 있다.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빠른 시간이
무례하고 거친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걸음은 파닥거리는 몸을 붙잡고 잠시 기우뚱거리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다.
걸음에 연결된 모든 관절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죽음
동작 속에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자라온 죽음이
있는 힘을 다해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사뿐사뿐 걷고 있다.
계간<현대한국시> 2008 여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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