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구름 산책 외 1편 / 최을원

시인 최주식 2010. 2. 7. 21:37

구름 산책 외 1편 / 최을원

 

은행나무 아래 벤치는 낡은 이젤이다 거기,

구름 캔버스가 있었고 중풍의 손가락 붓이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새들이 날아오르면 

시장통은 후들거리고, 느린 붓터치를 따라서 

목련은 녹슬고 벚꽃은 소멸과 완성의 한순간에

캔버스 밖으로 흩날려 갔다 평생 아무도

등장하지 않던 무변의 구름 들판, 언제부턴가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렸다 끝까지 가 본 적은 없다

늘 한복판을 돌고 도는 것이었다 들판은 꿈속까지 따라오고

하늘언덕에는 길고 긴 행렬이 자신의 해골을 

두 손에 받쳐들고 차례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멀리도 돌아온 사람, 너무 길었던 것이다 

캔버스가 유난히 하얗던 어느 날, 비로소

벤치가 은행나무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엔 가득한 노란나비 떼들 

하나씩 허공으로 떠나갔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오랜 유폐에서 풀려났다 

허공을 날던 나비들이 차례차례 화폭 속으로 

내려앉았다 끈질기게 내려앉았다

노랗게 덧칠된 들판 끝을 노인이 가고 있다

소년의 손을 잡고 막 고개를 넘어가는 중이다

원경으로 장엄한 일몰이 내리고

널부러진 막걸리 통 하나 근경으로 남았다

 

즐거운 우리집 / 최을원

   

  책가방을 맨 채로 아이는 컴퓨터를 열고 자기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 횟수는 0이다 0 속에 갇혀 게임을 한다 총성과 피가 흥건한 제로섬 게임, 뻔한 스토리, 혼자 먹는 밥처럼 이젠 지겹다 비로소 즐겨찾기를 연다 달랑 집 한 채, 방문횟수는 1년 전부터 매일 1이다 그 집에 걸린 배경 화면 ..... 잔잔한 물가에 나룻배 한 척 반쯤 잠겨 썩어가고 있다 아이가 뱃전에 올라앉자 졸던 물잠자리가 자리를 내어준다 물풀에 얹힌 자기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못생겼다 참 못생겼다 모니터 속에 손을 담그고 휘젓는다 휘저어버린다 안부게시판은 아껴 먹는 과자, 오물오물 연다 짠, 역시 아무런 댓글도 없다 다시 0 속에 갇힌다 그래도 아이는 여기저기 돌던 하루를 기웃기웃 적는다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꾹꾹 눌러 꼼꼼히, 애써 천천히 천천히 적는다 끝 - , 인사를 써야할 텐데 .... 물잠자리가 다시 날아와 연필 지우개 위에 앉는다 글씨들이 물풀처럼 흔들려, 자꾸만 풀어져 고민 고민하다가 어제처럼 그냥 남긴다 또 올게요 안녕, 엄마

 

  아파트는 여전히 캄캄하다 자정의 벽시계소리, 아이는 컴퓨터 문턱에 조그맣게 서있다 0과 1 사이, 안팎이 다 없다 나오지 못한다

  

  <다시올문학>  2009.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