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유리병 속의 가을 / 최형심

시인 최주식 2010. 2. 9. 22:41

유리병 속의 가을 / 최형심

 

 

   빈집은 수은주 하나를 허리춤에 걸고 있다. 강물로 흘러간 아이들을 기억하고 씨방에 차오른 기억이 서둘러 붉어졌다. 바람의 재료가 바뀔 때, 한층 높아진 귀뚜라미 소리에 수은주는 꼬물거렸다.

 

   부엌 한켠 빈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어둠, 누군가 저 적막을 떠서 두 손을 씻었을 것이다.

 

   한때 누군가 초록을 만졌으므로 그는 이제, 시를 써야 하리. 빈집에 사는 적막은 밤마다 은빛 바퀴살을 탄다. 한 마리 아름다웠던 뱀처럼 기적소리는 사과나무 밑에 묻혔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풍경을 버리고, 허공이 나비 떼를 몰고 비상한다. 민들레가 낳은 알들로 발효한, 그 속에서 이름보다 외로운 것은 없다. 별의 위쪽으로 부서지는, 밤이 기둥에 둥글게 감겨온다. 수은주가 어둠을 받아 건다.

 

   밤을 빌려 서로에게 기대는 것들에게도 포갤 꿈이 아직 남아있을까? 아이울음이 한 삽의 녹슨 별빛에 얹혀있다. 한 줄의 문장을 놓고 봉숭아 꽃잎이 떠난 뒤, 계절은 유리벽에 들었다. 이제, 이 집에 살고 있는 것은 수은주뿐이다.

 

 <시인시각> 2009.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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