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아홉 구름의 꽃에 관한 작법作法 외 4편 / 강경보

시인 최주식 2010. 3. 6. 22:39

아홉 구름의 꽃에 관한 작법作法 외 4편 / 강경보 

 

나의 버드나무 노래를 듣고 사랑을 청한 꽃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귀를 통하고 입술을 통한 말, 동침을 하기도 전에 떠나가 버린 꽃

아름다웠는데, 그 아름다움에 견줄만한 다른 아름다운 꽃이 찾아 온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시를 짓고 있었고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쓸던 붓 같은 꽃은 곧 나에게 저의 몸을 채워 주었다

따뜻하였는데, 그 따뜻함에 견줄만한 다른 따뜻한 꽃이 잠시 나의 귀에 머물렀을 뿐,

내가 거문고를 뜯고 있을 때 나의 사랑을 시험한 꽃이 있었다

위험하였는데, 그 위험에 견줄만한 다른 위험한 꽃이 대신 나를 사랑해 준 일이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잠시 나의 귀에 머물렀던 다른 따뜻한 꽃을 만난 일이 있었다

이것은 오래전에 다른 아름다운 꽃이 저의 마음의 하나인 듯 내게 보내기로 했던 약속의 꽃이었던 것

어느 날은 은혜로운 꽃이 사랑을 시험한 꽃과 한 몸인 것처럼 내게 청혼한 일이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버드나무 노래 아득하게 떠났던 꽃이 은혜로운 꽃의 향기를 품으며 다가와 재회한 일이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내가 전쟁 가운데에 있을 때 자객의 모습으로 찾아온 꽃도 있었다

내 죽어갈 목숨을 구하고 또 저의 몸을 허락한 갸륵한 꽃이었다

이제 꽃 속의 꽃이 동정 깊은 물에서 나를 부르니 가야 하리

꽃으로 태어난 내가 스스로 찾아오는 이 춘정의 봄날을 거역할 수는 없어

화인火印 같은 화인花印을 콱! 찍어 남기고자 하노니,

 

고요의 무늬가 날아가다 / 강경보

 

촤르르 분수가 음표처럼 쏟아지고

벙어리부부가 분수대 앞에서 마주 보고 서 있                            

두 손 올리고 내리고 휘두르고 비비고

내가 영 들을 수 없는 음역音域을 엮느라

분주하다 벙어리사내의 아기띠에 업힌

아이가 햇살눈썹을 깜박이며

오고 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좇고 있다

알고 있을까?

고요가 제 부모의 말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등 뒤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아버지의 등처럼 견고한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아이는 다시 어떤 세상의 언어를

제 몸의 무늬로 그려 넣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벙어리사내가 어깨너머로

아이를 쳐다본다 히힝 말울음 같은

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아부아부 아이가 방긋 웃는다

내 생애 처음 본 아이의 나비무늬가

함지박처럼 벌어진 벙어리사내의 입 속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다.

 

텔레비전 / 강경보

 

새벽,

어머니의 방에서 용접소리가 난다

문을 여니 어머니 벽쪽으로 누워 주무시고

회청색 가시광선을 뿌리며 혼자 타오르고 있는

12인치 텔레비전,

오래 되었을 것이다

긴 혀를 빼어물고 저 벽 콘센트에 흡착한 지

벽의 물관과 기공을 지나 아래로

용암이 펄펄 끓는 땅의 중심에 머무른 지

한 사람을 위하여 귀를 묻고 사는 일은

저토록 가슴을 데우는 것이라서

쉬지 않고 제 경전을 읽었으리라

마음의 화상畵像이 흐릿해질수록

가벼운 연애를 끝내고 돌아서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잘 떠오르지 않는 흘러간 노래 한 소절, 혹은

동해물과 백두산을 마르고 닳도록 읊다가

끝내 제 고독에 감전되어 발광하였을 것이다

어머니의 새벽잠이 늘어만 가고

슬픔마저 증발한 건조한 쪽방에서

아직 남아 있는 꿈을 꾸는 낡은 텔레비전

금속성의 옷을 한 꺼풀씩 벗으며

벽을 향해 돌아 누운 어머니에게로 가고 있다

소멸하는 말씀으로 한 새벽을

건너가고 있다

 

지진地震 / 강경보

 

받침 위 찻잔이 다르륵 떤다

장롱이 딱 소리를 내며 제 숨 한 번 분질러 보듯

고요가 어둠에 겨워 몸서리치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아니다

유리창이 흔들리고 추억을 더듬던 나무의자가

먼 별의 울림을 내 등에 던진다

깊은 밤 책을 읽다가 아뜩해진 나는

미궁의 백지 위를 질러가는 벌레가 된다

가족들 세상모르고 잠든 건넌방별을 보며

마음으로 울고 울어 세상에 흘러 보낸

강물이 족히 은하를 이루리라

온몸으로 갉아먹은 나뭇잎도 이미 지나온

사막처럼 흩어져,

어느덧 나는

휘갈겨 쓴 문자처럼 흔들리고 난 뒤에야

겨우 모래바람 덮인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

가끔 이렇게 세상이 먼저 뒤집어지는 날은

참 아득도 해라!

마음마저 뒤집으며 집 찾아가는 벌레의 길에서

 

수선화가 피는 창 / 강경보

 

언젠가 집 밖에서 내 방 창문을 보았을 때

하늘은 노을로 낮게 가라앉고, 골목 끝

먼 그림자 기척을 알리던 가로등 밑에 서서

차마 열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을 때

슬픔이 하굣길의 땡볕에 아지랑이처럼 흔들렸을 때

어두운 사랑방의 수음이 길고 긴 하루를 이끌고 갔을 때

언젠가 내 방에서 창 밖 골목길을 보았을 때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길 끝에서 길 끝으로 지나갔을 때

한없이 세상 밖으로 귀 기울이던

내 헐거워진 국어책에서 문자들이 졸고 있었을 때

아버지가 문득 방문을 열고

구석기시대 같은 눈길을 주었을 때

더럭- 방문이 닫히며 고요의 부피를 팽창시켰을 때

그토록 모든 것들이 이름 없이 살거나

마음 없이 뜻을 이루고 있을 때

나는 기어이 나의 창문에 돌을 던졌다

 

노란 수선화 화분 하나 기척 없이 물 올리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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