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십일월 / 정수경

시인 최주식 2010. 3. 14. 23:06

십일월 / 정수경

 

법률사무소 앞 벤치에  
십일월 햇살이 주춤거린다  
파산선고 받은 은행잎들 
벚나무 둥치 돌아 골목 뒤지는 바람에 

스산하게 밟히고 

저녁이 지상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빌딩 그림자 깊숙이 눌러쓰고 
벤치를 지고 있는 사내 
세상으로 나가는 모든 페이지가 봉인되었다 

주저앉을 듯 구겨진 정강이,

구두 볼에 묻은 막걸리의 흔적

허물어진 계단을 저 혼자 오르고 있다

 

단풍 드는 벚나무 
떨어지는 나뭇잎 자근자근 밟으며 웃는 아이야 
함부로 밟지 마라, 

깨진 유리창의 칼금으로

비명을 도려내고 있으니


잠든 가방을 추슬러 그가 일어선다 
홀쭉한 가방이 바짝 옆구리를 파고든다 
긴 그림자를 접어 사라진 골목 어귀 
잎 지는 자리마다 

꽃눈의 새 눈이 겹쳐진다 

 

계간<문학.선>200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