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진 팁 / 양애경
새 화장품 뚜껑을 열면
입구에 얇은 알루미늄 껍질이 달려 있지
그것을 잡아당겨 뽕! 떼면
그제서야 크림을 짤 수 있지
그걸 버진 팁(virgin tip)이라고 한다
새 제품의, 그러니까,
처녀막
처녀막을 잃으면 시집을 못 간다고,
테스는 딱 한 번의 일로 임신까지 해서
아이를 낳고, 잃고…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는데
첫날 밤 예전 일이 들통나 버림받고
결국은 살인범이 되어 사형대에 올랐으니
아이고, 처녀막…
남자에게 손목만 잡혀도 큰일나는 줄 알았고
꿈속에서 멋진 남자를 만나도 순결을 잃을까봐 놀라 깼다
불과 20년 후 세상이 어찌 변할지도 모르고
하긴 누구라서 새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온전한 내 것을 좋아하지 않새로 정들인 내 것,
내 손길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내 것
아무에게나 꼬리치는 애완견보다
주인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만한 개가 주인에겐 더 예쁜 것처럼
버진 팁,
여자들도 누군가의 동정을 떼어주고 싶다
동정을 떼어주고
평생 다른 여자 손길 타지 않게 지키고 싶다
하지만
누구든지
제품 취급당하는 건 싫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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