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숲에는 오래된 산책로가 있다 / 이은환
누가 이 길에 자주 왔었다,
길이 닳은 곳에 생각이 따스하다
은근히 눈짓을 하며 길이 휘는 그쯤에서 나도 같이 휘어본다
한 발 앞 서 먼저 걷고 있던 길은 가끔 멈추며 짐짓 정색을 하거나
그 때 슬쩍 품 안에 감추어 두었던 낭떠러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네가 말 해 봐,
여기서 멈춘다면 곤란하겠니 가만히 허리 숙여 눈을 맞추며
미소는, 무구하다
문득 멈춰 서보면 숲이 가꾸는 실핏줄들, 가느다란 잎맥이 잡힌다
따라오라는 손짓 같은 것이 희미하게 길 끝에서 보이기도 한다
굽는 것이 심심해진 길은
어딘가에 앉아 제 위에 떨어져 피어난 이야기들을 듣는다
길이 한 때 꽃 피는 까닭은
길이 그런 일들로 한창 수다중일 때이다
제 복판을 지나며 석양이 낭자해질 때마다
새들이 얼마나 고단한 목을 하고 와서 울다가 돌아가는지
서로 헤어진 깃털이 내려앉은 곳에서는
길도 사실, 잠시 동안, 울먹하긴, 했었는지,
길은 그러나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길이 여전한 이유는 기억이 기억을 덧대며 자라기 때문이다
이윽고 샛길 부근에 다다랐을 때
길은 한 번도 길을 따라 일어선 적이 없다,
헤어지는 일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맴맴, 천진한 아이는
그래서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다
여기서부터는 당신입니다,
숲이 이제 그만 악수를 내미는 갈림길에서도
길이 말갛게 끄덕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시집 <한 권의 책> 2010.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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