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에 너를 적시다 / 최승헌
내가 너의 몸에 초경처럼 비밀스럽게 찾아가서
그 몸을 붉게 물들이는 꽃으로 피어나거나
혹은 네 몸속을 떠도는 바람으로 산다면
너는 나의 어디쯤에서 머물러 줄 수 있을까
너에게 스며들고 싶어 수없이 내 몸을 적셨지만
불어터진 인연의 껍데기로는 어림도 없어
반송우편함에 틀어박힌 편지처럼 쓸쓸하기 짝이 없네
네가 꽃일 때 나는 꽃이 되었다가
네가 바람일 때 나는 바람이 되었지
꽃도 바람도 네 몸속에 잠들지 못해
입질만 하는 붕어처럼 실없이 네 이름이나 불렀지
물수제비뜨듯 너에게 나를 조금씩 던지는 밤,
파르르 떨며 지나가는 내 민망한 얼굴을
어둠의 꼬리가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네
하필, 이 눈치 빠른 계절에 꼼짝없이 걸려든 내 몸은
누가 끌어다 놓았는지도 모르는 어둠속에서
숨통이 턱턱 막히는데
봄밤이 너무 길어 자꾸만 너를 덮치려 하네
봄밤이 나를 자빠지게 하네
<현대시>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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