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기록 / 송찬호

시인 최주식 2010. 4. 30. 22:18

기록 / 송찬호

 

  대체 서기(書記)된 자의 책무란 얼마나 성가신 일인가 언젠가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코끼리 떼를 흰 종이 위로 건너오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숫자, 나이와 성별, 엄니의 길이와 무게, 무리의 지도자 습성, 이동 경로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의 길고 주름진 코로 노획한 물건들 ㅡ 옷핀, 금발 인형, 가발, 빈 콜라병, 탐정용 돋보기, 야구 사인볼, 샌들 한 짝, 담배 파이프, 테러리스트 복면 등, 온갖 문명의 잔해들도 자세히 적었다

 

  그들의 다리는 굵고 튼튼하다 포도주를 짓이겨 대지의 부은 발등에 붓고 거친 나뭇가지와 뿌리를 씹어 엽록의 공장을 돌리고 낫처럼 휘어진 거대한 비뇨기로 곡식을 베어 눕힌다

 

  그들에게 실항이란 없다 황혼이 오면 그들은 목울대를 움직여 그들의 사랑하는 악기, 튜바의 삼각주로, 전 세계로 흩어진 천 개의 코끼리강을 부른다 달콤한 무릎 관절의 샘이 흰개미를 불러모으듯, 다이아몬드 광산이 총잡이를 부르듯,

 

  홍해가 갈라지는 아침, 찢어진 범선 같은 귀를 펄럭이며 한 무리의 대륙이 새로운 길을 찾아 천천히 이동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골목> 2009.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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