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부처님오신날 앞두고 다시 읽는 『유마경』『아함경』

시인 최주식 2010. 5. 15. 20:45

[조우석 칼럼] 부처님오신날 앞두고 다시 읽는 『유마경』『아함경』 [중앙일보]

 

전에는 유독 『유마경』이 좋았다. 연극을 보는듯한 스토리 구조에다 주인공 유마힐 거사의 ‘까칠한 매력’에 끌린 탓이다. 다 아시듯 재가(在家)불자 유마는 붓다의 출가제자보다 자기 법력(法力)이 높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프다는 소문을 냈고, 문병 온 문수사리와 끝장 토론을 펼친다. 사리불·가섭을 혼내줬던 말재주가 어디 갈까? 이때도 하늘·땅, 선·악이 본디 하나라는 불이(不二)사상을 문수에게 깔끔하게 일러주는 데 성공한다. 그런 유마는 ‘천둥과 같은 침묵’은 물론 사람을 녹이는 화려한 레토릭에도 능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그에게 어찌 아니 끌릴까? 그의 대승철학은 대학시절에 강렬하게 다가왔지만, 요즘은 초기 경전 『아함경』이 좋아졌다. 덤덤하고 구수해서 좋다. 사실 붓다의 출생과 깨침, 이후 설법 묘사로 사실 이만한 경전이 드물다. 등장인물도 수두룩하다. 붓다의 당대에도 다혈질이 많았는데, 마룽키아풋타가 그랬다. 그는 “우주는 영원한가, 공간은 유한한가, 영혼은 육체와 같은가” 등 철학적 질문을 붓다에게 퍼붓는다. 붓다는 끝내 말려들지 않는다. 그건 “번뇌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질문”이라면서 그에게 청정한 수행부터 권한다. 부드럽고 원융한 모습, 그게 붓다다.

『아함경』에는 요즘처럼 극단을 달리는 사람이 없지 않다. 그 중의 하나가 테러리스트 데바닷다인데, 그는 붓다를 죽이려고 산에서 바위를 굴렸고, 야생 코끼리를 동원했다. 그런가 하면 자기 교단을 만들려는 음모까지 꾸몄으니 불교의 가롯 유다인 셈이다. 놀랍게도 그는 붓다의 충실한 시자(侍者) 아난다의 동생이다. 이럴 수가! 실은 아난다·데바닷다와 붓다는 사촌 사이이기도 하다. 역사 이래 인간의 갈등이란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일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의 인간 앙굴리마라가 있다.

극악한 도둑이던 그 역시 붓다를 해코지하려 했다가 되레 설복 당한다. 비구가 된 그는 과거를 잊은 채 수행을 거듭했다. 급기야 아라한의 반열까지 올랐던 앙굴리마라는 해탈의 감흥을 이렇게 노래했다. “악한 행위를 했어도 선으로 악을 끊으면/이 사람은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세상을 밝히리….” 데바닷다와 앙굴리마라는 선악의 담장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메타포가 아닐까? 역시 깨우침을 얻으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원력(願力)의 크기가 중요하고, 그에 뒤따르는 자구 노력이 핵심이다.

붓다는 예수·공자·소크라테스와 함께 차축(車軸)시대에 태어난 인류의 스승이다. 그들을 만나는 건 교실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지도 모른다. 그걸 표현한 영어가 ‘to be caught, not to be taught’이다. 그건 종교학자 오강남의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에 나오는데, 옆에 이런 말도 보여 함께 밑줄을 쫙 그었다. 막 태어난 시타르타를 본 히말라야 도인(道人) 아시타가 엉엉 울었다. 왜냐고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이 아기는 나중 붓다가 될 텐데, 나이 많은 나는 그 가르침을 못 들으니 안타까워서….” 붓다 이후 태어난 우리 모두는 거대한 행운아이다. 다만 법음(法音)에 어떻게 귀를 열어둘 지가 관건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