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나의 인생] 내 뼛가루에 서귀포 흙 섞어 도자기 빚어주오
서귀포 화가 이왈종
"그림만 그리다 죽겠다"… 20년 전 교수 자리 버리고 혼자 짐을 쌌다
밤 바다가 호통쳤다… "적당히 살지 말아라"… 맨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가 있었다
이왈종의 서귀포 작업실 통유리창엔 시커먼 새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꿩이며 새들이 창에 "꽈당" 부딪쳐 죽는 걸 보다 못해 그려놓았다. 그랬더니 날아든 새들이 횡사하는 일이 뜸해졌다. 유리창엔 투명 필름도 붙였다. 코앞 바다가 몰아붙이는 바람에 유리가 남아나지 않아서다. 필름 덕분에 유리창이 깨지진 않아도 강풍이 불 때면 안으로 1㎝쯤 휜다.
그의 집 마당엔 서귀포의 자연과 사계(四季)가 고스란히 찾아든다. 동백 매화 수선화 엉겅퀴꽃 달개비꽃 석류꽃 산국…. 일년 열두 달 꽃이 피고진다. 먼나무, 섬쥐똥나무 같은 서귀포 유실수들이 꿩, 직박구리, 까치를 불러들인다. 바람도 꽃도 새도 그에겐 모두가 화폭(畵幅)의 손님들이다. 그는 그걸 캔버스에 옮긴다.
이왈종은 새벽 2~3시면 일어난다. 파도소리와 바로 옆 정방폭포 쏟아지는 소리, 새 소리가 잠을 깨운다. 그는 날이 밝도록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20년 서귀포 삶이 허락한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는 1990년 마흔다섯에 추계예술대 교수 자리를 버렸다.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짐을 쌌다. 경조사(慶弔事)나 제자 졸업미전 안 가도 덜 미안할 만큼 먼 곳을 찾다 보니 서귀포였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리며 고독과 설움을 삭였던 서귀포에서 그는 외로운 고행(苦行)을 자청했다. "한 5년 그림만 그리다 죽겠다" 맘먹었다.
가랑비 흩뿌리는 아침,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큰엉 바닷가 길을 걸었다. 높이 20m 기암절벽이 성채처럼 둘러쳐진 위로 산책로가 나있다. 잔뜩 찌푸린 날이지만 툭 트인 바다와 늘푸른 동백·섬쥐똥나무 숲 사이를 걷자니 공기가 맑다 못해 달다. 동백꽃은 벌써 졌다. 길가엔 새끼손톱보다 작은 보랏빛 제비꽃과 노란 등대풀꽃, 하얀 장딸기꽃이 피었다. 뭍보다 두 달쯤 빠른 개화(開花)다.
이왈종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남원 바닷가였다. 아파트 반지하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하루 열몇시간씩 그려댔다. 얼마나 외로웠던지 화판에 파리 한 마리 날아가는 게 반가웠다. 붓을 잡아도 손만 서귀포에, 마음은 서울에 있었다. 붓을 내던졌다. 손에 피가 나도록 돌과 나무를 쪼았고, 노동하듯 부조(浮彫), 도자기, 목각에 매달렸다.
방에 올라가 지친 몸을 누이면 바다에 떠있는 듯했다. 추운 겨울밤 조각배가 파도에 묻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데도 어부는 고기를 잡고 있었다. '난 뭐냐, 고작 이런 걸로 힘들다 하고 있으니.' 서귀포 바다가 그에게 '적당히 살지 말아라, 치열하게 살아라, 겸손해져라'고 호통쳤다.
그는 13년 전 정방폭포 옆에 정착했다. 집 앞으로 올레길이 지나간다. 그 길 따라 5월 바닷가로 내려가면 길옆 바위에 깨알만한 꽃들이 하얗게 피어있다. 꽃을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스케치하면서 그는 먼지 속에도 무수한 시방(十方)세계가 있다는 불가(佛家) 말씀을 실감했다. 그림에서 형식 깨뜨리기를 배웠다.
맨눈에 보이지 않는 속에 우주가 있다는 걸 깨닫는 행복, 그는 자기 그림을 걸어두는 사람도 그런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컴컴하고 우울한 것 대신 편안한 것, 밝은 것을 담기 시작했다. 마당에 가득한 꽃을 그렸다. 동백꽃 속에 그가 살고, 새도 달개비꽃도 사람보다 크다. 하늘엔 물고기가 날아다닌다. 그는 "작품세계를 서귀포에서 비로소 모색하고 완성했다"고 했다.
이왈종은 서귀포가 베푼 것을 갚으려 한다. 10여년 전부터 어린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친다. 재료도 대주고 중학교 가면 30만원씩 장학금도 준다. 경기도 화성의 가난한 농사꾼 아들이었던 그는 몸이 하도 약해 농사도 못 지을 아이로 쳤다. 중학 때 미술선생님이 좋아 미술반에 들어갔다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는 서귀포 아이들에게도 길을 열어주고 싶어한다. 서귀포시가 이중섭 살던 집을 복원하고 이중섭미술관을 세울 때도 힘을 보탰다. 서울 화랑들을 찾아다니며 이중섭을 포함한 그 시대 그림 100여점을 기증하도록 설득해냈다.
왼쪽으로 섶섬, 오른쪽으로 문섬이 보이는 서귀동 언덕길에 이중섭이 1951년 한 해 피란와 지냈던 초가집이 있다. 이중섭은 한 평 반 방을 얻어 아내, 두 아들과 다리를 포개고 살았다. 배가 고파 게를 잡아먹었어도 행복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가 이때 나왔다. 이중섭에게 서귀포는 지상낙원이었다.
이중섭미술관은 작년 9억원을 들여 이중섭 작품 두 점을 샀다. 지역사회로선 큰돈이지만 서귀포 시민들은 천재화가와의 짧지만 소중한 인연을 사랑하고 자랑할 줄 안다.
옛 서귀포 25㎞ 해안선을 가리키는 '서귀포 칠십리'는 오래전부터 이상향(理想鄕)의 다른 말이었다. 월북시인 조명암이 서귀포에 반해 노랫말을 붙인 남인수 노래도 있다. 서귀포는 2006년 남제주와 합치면서 성산부터 대정까지 제주도 절반을 아우른다. 그 해안선엔 성산 일출봉부터 섭지코지, 표선, 남원큰엉, 쇠소깍,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외돌개, 주상절리, 중문, 용머리해안, 모슬포까지 숱한 명승이 늘어서 있다. 그 서귀포에 오면 누구든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다. 이동주는 시 '서귀포'에서 "여기 오면 주름이 펴진다. 흰머리도 검어지고"라고 했다.
이왈종은 서귀포에서 죽겠다고 했다. 화장한 유골에 서귀포 흙을 섞어 도자기를 빚으라고 유언할 참이다. 죽어서도 작품을 만들겠다는 뜻이라고, 서귀포 바다가 그렇게 하란다고 했다. "버렸더니 얻어지더라"는 그도 이따금 집착에 빠진다. 그럴 때마다 이생진의 연작시 한 편을 읊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가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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