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나의 도시 나의 인생] 일산 / 소설가 은희경

시인 최주식 2010. 5. 15. 21:15

[나의 도시 나의 인생] 일산 / 소설가 은희경

내 삶은 일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내가 누군지 알고 살아야겠다"
절망의 벼랑 끝에 찾아온 신도시
이곳에서 소설 쓰며 내 인생 찾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과거가 없는 도시 모퉁이에서
부조리한 삶을 이야기한다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태국마사지, 노래방, 24시간 당구장…. 인터넷에 장편을 연재하면서 은희경은 밤새워 쓰는 날이 많다. 쓰다 지칠 때면 장항동 오피스텔 13층 집필실 저 아래서 유흥가 불빛이 깜빡이며 응원한다. '깨어 있는 건 너만이 아니야'라고.

집필실은 책상 하나, 작은 냉장고가 놓인 원룸이다. 벽엔 문학상 받은 날 뒤풀이,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린 날의 즉석사진들이 붙어 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무거움에서 벗어나 가볍고 쉽게 쓰려 한다. 기운 없고 처질 때면 길 하나 건너 호수공원에 간다. 호수를 두 바퀴 뛰면 8km다. 그는 한 해 한두 번씩 마라톤대회에 나간다. 지난달에도 어느 대회 하프코스를 2시간 3분에 뛰어 3등을 했다.

호수공원은 일산 사람들에게 산소통 같은 곳이다. 작년에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산책이나 달리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뽑혔다. 환경부가 공기와 주변환경, 접근성을 따졌더니 100점 만점에 98.25점이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은희경과 함께 나선 호수공원에 개나리·산수유가 피었다. 버드나무도 아기 손처럼 여린 연두 잎을 한껏 내밀었다. 잔뜩 흐렸어도 자전거 타는 아이들, 아들과 공을 주고받는 아버지, 강아지 산보시키는 할머니들로 생기가 넘친다. "서울은 답답해요. 장악할 수 없는 곳이라 편치 않지요. 일산은 뛰어다니고 자전거 탈 곳이 있잖아요." 그가 15년 전 일산으로 옮겨왔을 때부터 호수는 큰 위안이었다.

은희경의 삶은 서울과 일산, 둘로 잘리듯 나뉜다. 그는 대학을 나온 뒤 직장을 몇 군데 다녔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결혼해 남매를 낳고도 '남에게 맞춰 꾸며진 인생'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1994년 가장 힘들던 벼랑 끝에서 '내가 누군지 알고나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으로 소설을 썼다. 이듬해 1월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그해 봄 일산 아파트로 이사 왔다. 친척 언니가 권해 구경 왔다가 전원 느낌도 있어서 부대끼지 않고 살겠다 싶어 결정했다. 같은 전셋값으로 넓은 아파트도 얻었다.

일산은 과거라는 게 없는 도시다. 어느 날 땅에서 솟아난 도시다. 그는 "일산에서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됐다"고 했다. 신도시와 새 삶이 맞아떨어졌다. 작가 은희경에게 일산은 카프카의 프라하, 오스터의 뉴욕, 파묵의 이스탄불이다.

인터넷에 연재하는 '소년을 위로해 줘'는 그가 사는 아파트 앞 학원가 풍경에서 떠올렸다. 밤이면 버스들이 학생들을 태워 갈 행선지 팻말을 죽 세워두고 서 있다. 그는 "팻말대로 가는 삶이 아닌데, 아이들이 짠했다"고 했다. 이 소설에서 일산은 '끝나는 곳마다 나타나는 또 다른 아파트 단지들. 마치 하나의 풍경을 블록으로 잡아서 복사한 뒤 컨트롤V 키로 계속 붙이기를 해놓은' 도시다.

단편 '아내의 상자'에는 '언제 봐도 단정한 아파트단지… 하늘도 언제 봐도 대충 그런 색의 지루한 안정의 빛이고 공기의 냄새마저도 도식적'이라고 썼다. 장편 '그것은 꿈이었을까'에선 일산을 휘감아도는 밤안개로 낯설고 모호한 삶을 이야기했다.

은희경은 일산의 구조를 "호수공원 동북쪽으로 오피스텔촌, 번화가 '라페스타', 관공서촌, 정발산 카페촌, 경의선 기찻길이 차례대로 늘어서 있다"고 간명하게 설명했다. 옛날엔 경의선 너머 '구(舊) 일산'에 꽃시장과 닷새장이 섰지만 이젠 다 아파트촌이다.

일산역으로 안내하던 그가 당황했다. "어, 여기가 아닌데. 여긴 왜 이렇게 됐지?" 작년 여름까지 신촌행 열차를 타곤 했던 단층짜리 일산역은 폐쇄돼 있었다. 그 옆으로 번듯한 3층 새 역사(驛舍)가 서 있다. 일산 사람에게도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게 일산이다. 나날이 빽빽해지고 사람 냄새는 바래간다.

그가 1984년 잡은 첫 직장이 일산역 부근 사립학교였다. 신촌에서 하숙하며 경의선으로 통근했다. 더운 날 일산역에서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다 학생들 인사를 받고 머쓱해지곤 했다.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게 맞지 않아 1년도 안 돼 그만뒀다. 10년 만에 일산에 살러 온 뒤에도 자주 경의선을 탔다. "기다리는 맛이 괜찮았는데." 문 닫은 일산역 앞에서 그는 허망해했다.

백마역은 아예 옛 역사가 철거됐다. 1970~80년대 서울 젊은이라면 한두 번 통기타 메고 주말 나들이 오던 곳이다. 표 받는 사람도 없어 간이역 깡통에 표를 던져넣으면 그만이었다. 역 앞에 과수원과 원두막과 카페가 그림처럼 들어선 카페촌이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카페들은 2㎞ 떨어진 풍동 애니골로 옮겨왔다.

애니골 초입에 지붕이 높아 작은 교회처럼 보이는 벽돌집 카페 '숲속의 섬'이 있다. '옛날처럼 기차 타고 와보세요. since 1980'이라고 쓰여 있다. 80년대 연대·이대 다니던 기형도·성석제·나희덕·정끝별 같은 문청(文靑)들이 시낭송회도 하던 곳이다. 젊은이들을 겨냥한 상권(商圈)은 정발산 카페촌에서 '라페스타'를 거쳐 최근엔 시가지 남쪽 쇼핑몰 '웨스턴돔'으로 옮겨갔다.

은희경은 "일산엔 개발연대(年代)식 욕망이 있다"고 했다. 이곳을 발판 삼아 한 단계 올라서려는 신분상승 욕구들이다. 그래서 그는 일산에서 안락, 쾌적한 것보다 인간의 나약하고 부조리한 이면을 본다. 그게 내 모습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산에 애증(愛憎)을 품고 있었다. "만든 도시라 편리하면서도 뿌리를 내릴 것 같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긴 다른 도시는 더 나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