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신문칼럼)

봉천동 옥탑방에서 내 소설들이 몸을 풀었다

시인 최주식 2010. 6. 6. 16:17

[나의 도시 나의 인생] 봉천동 옥탑방에서 내 소설들이 몸을 풀었다

 

서울 봉천동(중앙동) 소설가 조경란
봉천동은 내 삶이 가장 뜨겁게 지나간 자리
대학서점에서 문학 열정 키우고
관악산 기운 받으며 '나는 봉천동에 산다'

누군가 조경란에게 물었다. “정말 봉천동에 사세요?” 이 사람이 몇 년 뒤 다시 물었다. “아직도 봉천동 사세요?” 얼마 전 만났더니 질문이 이랬다. “언제까지 봉천동 살 거예요?” 조경란에겐 흔한 일이다.

그의 본적은 ‘봉천동 산1번지’다. 영등포에서 태어나 세 살 무렵 봉천동서도 가장 높은 달동네로 왔다. 두 차례 이사해 집이 중턱으로 내려왔을 뿐 마흔한 살 지금까지 봉천동에 산다. 그는 차갑다 할 만큼 외모가 세련돼서 패션잡지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때 기자가 세 번을 물었다. “정말 봉천동 사세요?”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조경란도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산다”고 둘러대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을 떠받들고 산다는 봉천(奉天)이라는 지명이 촌스러웠다. 거기 밴 낙후와 궁핍의 이미지가 싫었다.
서울대입구역 네거리 커피집 스타벅스에서 그를 만났다. 평일 낮 젊은이들로 붐빈다. 그는 통유리로 도로와 마주한 창가 자리에 즐겨 앉는다. 거기 앉아 글도 쓴다. 3시간이면 단편 원고 한 편은 수정한다. 산만할 것 같아도 차분해지고 객관적이 된다. 그는 “홍대 앞이나 신촌에 가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스타벅스를 나서 서울대 쪽으로 걸었다. 큰길가 김밥집 앞을 지나면서 그가 얘기를 꺼냈다. “대입에 실패한 뒤 5년을 집에 틀어박혀 지냈어요. 집을 지어 팔던 아버지 사업이 잘돼 엄마 몰래 용돈을 쥐여주시곤 했지요.” 그는 용돈을 쪼개들고 동네 ‘대학서점’으로 하루 한 차례 외출해 책을 샀다. 이 작은 인문·사회과학 서점에서 문학을 향한 순수한 열망에 휩싸여 소설책부터 이론서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고 스물여섯에 서울예대 문창과에 들어갔고 이듬해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대학서점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3년 전 어느 날 책방은 한 줄에 1500원 하는 김밥 체인점이 돼 있었다. 당장 가게로 들어가 김밥을 시켰다. 김밥을 들고 온 남자가 책방 주인이었다. 서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뭔가 철커덕하고 닫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건너편 ‘원조기계우동’에서 점심을 들었다. 그가 밤새워 글을 쓴 뒤 산보길에 3000원짜리 국수 국물로 속을 달래던 단골집이다. 그는 맞은편 으리으리한 관악구 신청사를 가리켰다. “15년 전만 해도 구청 부근에서 서울대 넘어가는 길 양쪽이 다 숲이었어요.” 지금은 아파트가 숲을 이뤘다. 그는 20년 전부터 다니던 서울대 산보를 3년 전 끊었다. 봉천동은 허망하게 변해갔다.

돌아나와 봉천고개 가는 큰길 오른쪽 봉천중앙시장에 갔다. 100m도 안 되게 짧고 좁은 재래시장이다. 생선, 잡화에 오가피잎·뽕잎 파는 가게까지, 드물게 토속적이다. 시들어가던 시장이 언덕 위로 아파트촌이 들어서면서 오히려 되살아나 걷기가 힘들 지경이다.

맏딸 조경란은 서너 살 때부터 어머니 손에 이끌려 중앙시장에 다녔다. 닭을 산 채로 잡는 모습, 도넛 튀기는 냄새에서 음식에 대한 원초적 감각을 배웠다. 학교도 다니기 전에 도넛을 만들어 두 여동생에게 먹였다. 두 동생 함 받을 때 상(床)도 한식과 중식으로 차려냈다. ‘식빵 굽는 시간’부터 ‘국자이야기’, ‘혀’까지 소설집마다 들어 있는 음식 이야기의 원천이 중앙시장이다.

시장 건너편 붉은 벽돌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언덕길에 그의 집이 있다. 동네 입구엔 꼬불꼬불 골목 따라 옷수선집·생선가게·떡집이 늘어서 있다. 강남역 다음으로 유동인구가 많다는 서울대입구역 요란한 대로변과 언덕 위 거대 아파트단지 사이에 70년대 주택가 모습으로 끼어 있다.

조경란의 집은 출입문 셋 달린 2층 다세대주택이다. 딸만 셋 둔 아버지가 노후에 세(貰)를 받아 쓸 생각으로 20년 전 지었다. 자그만 옥탑방도 올라앉아 있다. 그가 등단 때부터 13년 내내 글을 쓴 방이다. 딸 중에 누군가 작가가 되기를 바라며 옥탑방을 올렸던 아버지도 맏딸이 하도 책을 쌓아두는 바람에 무너질까 겁을 냈다.

옥탑방에서 보는 보름달은 두 배는 크고 가까웠다. 글이 안 써지면 달을 향해 기도했다. 창틀에 걸터앉아 남쪽 관악산 연주대를 보며 장엄한 산세 아래 산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나는 봉천동에 산다’를 비롯해 자전소설도 여럿 썼다.

3년 전 셋방 하나가 비면서 1층으로 작업실을 옮겨왔다. 작은 부엌과 화장실 딸린 7~8평 공간이다. 통로 벽부터 책장이 점령했다. 2만권쯤 돼 보이는 책이 방안 삼면 책장에까지 꽉 차 있다. 모두 읽은 책이라고 했다. 이 방 앞에서도 관악은 보이지만 이젠 수십 층 주상복합건물들이 연주대를 가려버렸다.

작년 5월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건강보험공단 엽서가 와 있었다. ‘생애 전환기’를 맞은 69년생에게 무료 검진을 해준다는 안내문이었다. 주소가 이상했다. 봉천10동이 아니라 ‘중앙동’이었다. 나가 있는 사이 봉천본동과 봉천1~11동이 행운동·성현동·청룡동·은천동 식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달동네 냄새 나는 ‘봉천’이 싫다는 주민 의견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엽서에 쓰인 40세 ‘생애 전환기’라는 글귀와 겹쳐 묘한 상실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뒤로 택시를 타면 부러 “중앙동 가자”고 해본다. 기사들이 하나같이 “어디요?” 되묻는다. 결국 “봉천동”을 댄다.

조경란에게 봉천동은 ‘내 삶이 가장 뜨겁게 지나간 자리’다. 다른 곳에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어디에 떠나 있건 돌아올 생각부터 한다. 그의 집 우편함엔 여전히 ‘서울시 관악구 봉천10동…’이라고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