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명명한다 / 이은환
초록은 숲의 과잉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 숲을 본 적이 없다
초록이 숲의 경계를 차츰 지우는 저녁이 오면
숲은 자욱한 제 어둠의 밀도를 본다, 숲은 그 때 조금씩 옮겨 앉는다
숲이 움직인다는 건 길을 잃어본 새들만 아는 일이다
거기서 자주 볼 수 있는 일 중에는 당신도 있다
로스트……메모리……등등의 이름을 가진 새들이 산다
함부로 발자국 소리를 냈을 때 숲이 순간 멈추는 이유는
누군가 그 부근에서 자주 걸려 넘어진 적이 있어서이다
그쯤에서 오래된 울음을 만난다면 선 채로 나무처럼 눈을 감아 보시길
그러면 숲의 그라데이션, 응달의 노래를 풀어 놓을 것이다
그런 언젠가의 저녁,
한 번은 숲이 몹시 내게 들킨 적이 있었다 노래를 듣기 위해
내가 잠시 내려앉았을 때의 일이다
한 때 소란스럽던 꽃길을 덮으며 숲은 자란다
깊이 불러 준 적 없는 숲이므로 나는 아직 그 숲을 다 알지 못한다
혼자서도 잘 크는 아이처럼
때때로 휘파람소리 숲 밖으로 등 떠밀어 보냈을 뿐
다친 것들이 모두 소리를 내지는 않는단다,
묵묵히 위로 자라거나 옆으로 지평을 넓히면서
그늘의 용적은 넉넉하다
숲은 그런 그늘을 갖고도 푸르다
시집 <한 권의 책> 2010.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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