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숲을 명명한다 / 이은환

시인 최주식 2010. 5. 15. 20:51

숲을 명명한다 / 이은환

  

 

초록은 숲의 과잉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 숲을 본 적이 없다

 

초록이 숲의 경계를 차츰 지우는 저녁이 오면  

숲은 자욱한 제 어둠의 밀도를 본다, 숲은 그 때 조금씩 옮겨 앉는다

숲이 움직인다는 건 길을 잃어본 새들만 아는 일이다   

 

거기서 자주 볼 수 있는 일 중에는 당신도 있다

로스트……메모리……등등의 이름을 가진 새들이 산다

함부로 발자국 소리를 냈을 때 숲이 순간 멈추는 이유는

누군가 그 부근에서 자주 걸려 넘어진 적이 있어서이다 

 

그쯤에서 오래된 울음을 만난다면 선 채로 나무처럼 눈을 감아 보시길

그러면 숲의 그라데이션, 응달의 노래를 풀어 놓을 것이다    

그런 언젠가의 저녁, 

한 번은 숲이 몹시 내게 들킨 적이 있었다 노래를 듣기 위해

내가 잠시 내려앉았을 때의 일이다

 

한 때 소란스럽던 꽃길을 덮으며 숲은 자란다

깊이 불러 준 적 없는 숲이므로 나는 아직 그 숲을 다 알지 못한다

혼자서도 잘 크는 아이처럼 

때때로 휘파람소리 숲 밖으로 등 떠밀어 보냈을 뿐

 

다친 것들이 모두 소리를 내지는 않는단다,

 

묵묵히 위로 자라거나 옆으로 지평을 넓히면서

그늘의 용적은 넉넉하다

숲은 그런 그늘을 갖고도 푸르다

 

 시집 <한 권의 책> 2010. 문학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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