病 / 정진경
아버지 주려고 담근 오디주
발효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라졌으므로
뚜껑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오디주 병 안에 밀봉되어 버렸고
아버지와 함께 순장된 오디를 나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존재할 의미를 상실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오디주 붉은 핏줄이 술병을 타고 오르면서 살아났다
봉인된 마개를 언제 헐었는지
오디주를 먹은 아버지
온몸에 오디를 품고 저승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순장이 죽음이라는 인식을 뒤엎었다
순장하는 풍습은 죽음이 아니라
홀로 있는 시간을 배척하는 사람의 병증이다
아버지를 홀로 보내지 않으려는
내 병 증세이다
시집 <잔혹한 연애사>도서출판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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