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 낭송/낭송하기 좋은 시

정끝별/황금빛 키스

시인 최주식 2010. 8. 14. 23:05

정끝별 『황금빛 키스』

상상의 시간을 살고
졸음의 시간을 살고
취함의 시간을 살고
기억의 시간을 살고
사랑과 불안과 의심의 시간을 살고

폐결핵을 앓던 시절 한 여자를 사랑한 적 있다
왼팔이 빠진 채 언니 등에 업혀 울면서 누런 소다 찐빵을 먹었는데, 정말로
흰 왜가리를 탔다, 왜가리의 펼친 날개가 너무 커 창천(蒼天)이 깨지고 벼락을 맞기도 했건만
꿈속 남자와 방 한칸 얻어 살림을 살았던가
아버지 도박빚에 버스차장이 되어, 미싱공이 되어, 급기야 접대부가 되어
달랑 시집 한 권 남기고 서른세 살에 요절했다 간절히
첫키스를 했던 남자와 두 딸과 부득부득 살고는 있지만

불쑥 돋아나 칭칭 감기며
조각난 채 일렁이는 불의 끝처럼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한 손은 밤식빵을 뜯으며 그랜드힐튼을 오가다 문득
봉쇄수도원의 대침묵에 감춰진 희디흰 맨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나였던가?
이미 결혼한 적이 있고 아들이 하나 있음을 떠올리고는 소스라치듯
눈이 까만 순록이 되어 눈 덮인 툰드라를 헤맬 적 발바닥이 타는 듯 시렸던
서귀포 물가에 나란히 누워 저무는 생의 끝맛을 보았건만
한여름 네거리에서 빨간 원피스의 미아가 되어 아모레 아모레 미오를 듣던 그때나 지금이나

촌충의 몸은 도대체 몇마디일까
아메바의 촉수는 몇가닥일까

삶이 이게 전부일 거라 생각할 수 없다
시간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되솟는다
나비처럼 펄럭이며 떠다닌다
아직까지 누구도 아니었던 나는
눈을 감고 기다린다 황금빛의

시인의 시간을
도둑의 시간을
거짓말의 시간을
발기된 탑과 덩굴과 안개의 시간을

< 정 끝 별 시인(鄭끝별) >

약력: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시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시선해설집 <밥>,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등이 있음

유심작품상(2004), 소월시문학상(2008)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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