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결 / 이정록

시인 최주식 2010. 8. 23. 23:44

/ 이정록

 

철물점에 갔다가

톱날 묶음을 보았다

톱니들이 물결처럼 보였다, 손을 대면

물방울이 튀어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톱날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누군들 자르는 일에 몸담고 싶으랴

톱날을 어루만지며, 나는

얼음집에 가면 톱으로 엉킨 물을 푼다고 말했다

믹서의 톱날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이빨을 번뜩이며, 자기는 정말 파도를 닮아서

크게 한 번 출렁이면 천 년 묵은 고목도 순식간이라고 으스댔다

누구나 톱날 하나쯤은 악다물고 살아간다고

내가 아는 실패한 친구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나무가 살집을 오므려 비틀어 버리면

너는 토막난 쇳조각에 불과할 뿐이라고

녹슬 줄밖에 모르는 불쌍한 말년이 될 뿐이라고

타일러 주었다. 일생 억눌려 사는 바위도

결만 좋으면 구들장이 될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톱날에 껴 있던 파도 한 줄기가

내 마음의 얼음장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시린 철새의 발가락도 보였다

깃털 속으로 햇살 들이쳤다

 

 시집<의자> 2006.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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