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포도밭이 있는 마을 / 전명숙

시인 최주식 2010. 9. 1. 22:31

포도밭이 있는 마을 / 전명숙

 

  원래 이 마을은 포도밭이었네. 포도밭을 갈아엎은 뒤 포도나무는 사라졌지만 뿌리의 기억은 지금도 살아있네. 포도넝쿨은 틈만 나면 집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네. 바닥으로 천장으로 기어나온 넝쿨손 잡아당겨 노란 줄무늬 무당거미가 몇 겹의 덫을 놓네. 아무도 몰래 피었다 지는 포도꽃이 소녀들의 가슴에 진초록 포도알을 슬어놓네. 멍울져 아픈 젖가슴 때문에 소녀들이 골목을 뛰쳐나가네. 딸들을 기다리며 엄마들은 항아리가 가득 차도록 검은 유두에서 포도즙을 짜네. 이윽고 시큼했던 골목이 발효되기 시작하고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멀리로 퍼져나가네. 진보라색 포도 내음에 이끌려 배가 불룩해진 소녀들이 집으로 돌아오네. 마을에는 눈이 까만 아이들이 주렁주렁 태어나네. 집집마다 아기들 울음소리 익어가네.

 

  <리토피아> 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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