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검돌/오순택
개울을 건널 때
등을 내어 준
돌이 아파할까 봐
나는 가만가만 밟고 갔어요.
+ 꽃 . 잎 / 한귀복
잎이 다칠까봐
위에서 피는 꽃
꽃이 다칠까봐
아래에 놓인 잎
그래서 예쁜
꽃 . 잎이구나
+ 그건 너지 / 홍우희
누가 느낄까
네 개의 귀를
활짝 펴서
무어든 덮어주는
보자기의 고운 마음을
누가 배울까
네 개의 귀를
꽁꽁 묶어
누구든 감싸주는
보자기의 귀한 마음을
+ 덩이 / 박예분
흙덩이, 복덩이, 햇덩이
달덩이, 돌덩이, 메주덩이
눈덩이, 얼음덩이, 불덩이
똥덩이, 소금덩이, 황금덩이
모두 작은 덩이로 이루어졌지만
하는 일은 다 다르다.
나는 총소리 울리는
저 바다 건너
배고픈 아이들 배를 불리는
빵 한 덩이 되고 싶다
+ 수재민 / 박두순
어깨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도
너무 무겁다.
머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도
너무 아프다.
+ 둘이는 똑같이 / 이혜영
신발주머니에 들어간 신발은
미안했어요.
흙이 묻어서......
"괜찮아.
주인을 위해 일했잖아?"
신발주머니는 신발을
꼭 안아 주었어요.
둘이는 똑같이
흙투성이가 되었어요.
+ 그 병실에서 / 전영관
달리기하는 아이
산책하는 아이
병실 창문으로
부러운 듯 내려다보던
그 길을 혼자 걸어봅니다.
걸으면서 내가 내려다보던
그 병실 창문을 올려다봅니다.
지금도 누군가
그 병실 창문으로 나를
부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겠지요.
병실로 달려가
그 아이 손을 꼬옥 잡아주고 싶습니다.
+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 이화주
한 대학생 누나
너무 배고파
메추리알, 우유, 김치, 핫바
6,650원어치 훔쳤다고 한다.
설 때도 고향집에
아무도 없는 누나
누나의 가난을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누나의 슬픔을
누가 훔쳐갔음 좋겠다.
+ 더 주고 싶어 / 김재용
퐁퐁
샘솟는
옹달샘 마냥
마냥
주고도
모자란 마음.
풋고추를
빨갛게
풋사과를
빨갛게 익혀 놓고도
해님은
서산마루에서
머뭇머뭇
마냥
주고도
더 주고 싶어.
+ 어린 고기들 / 권태응
꽁꽁 얼음 밑
어린 고기들.
해님도 달님도
한번 못 보고,
겨울 동안 얼마나
갑갑스럴까?
꽁꽁 얼음 밑
어린 고기들.
뭣들 하고 노는지
보고 싶구나.
빨리빨리 따순 봄
찾아오거라.
+ 세탁소집 아저씨 / 정현정
키가 작아요
걸음이 서툴러요
다림질할 때는
온몸이 흔들려요
팔도 다리도 웃고 있어요.
저녁이면
바느질하던 아내가 탄 휠체어를 밀고
집으로 가요
아저씨가 웃어요
눈도 입도 눈썹도 웃어요
아저씨 가슴에는 웃음이
세들어 살고 있나봐요
+ 텔레비전 속의 아프리카 / 유은경
물을 얻기 위해
40킬로를
걸어가야 한다면
물 한 컵 마시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면
수돗물 틀어 놓고
이 닦진 않을 거야.
거품 벅벅대며
머리 감진 않을 거야.
정말 내가
아프리카 케냐의 아이라면
수많은 꿈 제쳐 두고
비 되고 싶을 거야.
메마른 물동이마다
그득그득 채우고
강과 호수에 넘실거리는 비.
+ 동전 한 닢 / 허영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삭아들지 않고
발바닥에 밟혀 누그러들지 않고
차바퀴에 깔려 오그라들지 않고
길바닥에 버려진
동전 한 닢
정성껏 닦고 닦아 빛을 냈습니다.
따스한 손바닥에 꼬옥 쥐고
밟히고 깔려 멍이 들었을
아픔을 감싸주었습니다.
+ 돌멩이 한 개 / 노원호
학교 갔다 오던 길에
돌멩이 한 개를 발로 찼다.
돌멩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찻길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렇지만
언젠가 내 짝꿍이 내게 준
고 작은 조약돌처럼
자꾸 마음에 걸린다.
-혹시 차에 치이지는 않을까?
-누군가 멀리 던져버리지는 않을까?
무심코 차버린 돌멩이 하나가
이렇게 내 마음을 빼앗아 갈 줄이야.
어둠이 내리는 방안에
나는 내 스스로
나를 가두어 놓고 있다.
+ 참 잘 했어요 / 박경옥
'김밥천국', 세탁소, 25시 편의점
나란히 줄 선 상가 모서리에
폐지 줍는 할아버지
손수레 세워 놓고
쪼그리고 앉았어요.
손에는 호호
때늦은 점심 컵라면
"할아버지,
이거랑 같이 드세요."
옷 수선 맡기고 돌아서던
하늘채 아파트 1층 아줌마
'김밥천국' 김밥 한 줄
은박지에 사 왔어요.
"참 잘했어요."
해님이 반짝
은박지에
칭찬 도장 찍어 주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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