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그리고詩/1,000詩필사

가장 가벼운 밤의 위치 외 1편 / 권영랑

시인 최주식 2011. 1. 16. 15:26

가장 가벼운 밤의 위치 외 1편 / 권영랑


  보르네오산 옷장 속에 오래 전 묻어둔 바람, 한때 즐겨 입었던 새하얀 시폰 블라우스 한 장이 어둠을 밀어내며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새의 허기가 새를 날게 한다고
  네모반듯하게 잘린 보르네오가
  세 평 반 생의 바깥을 기웃거리며 삐걱이고

 

  오래전 아침이 남긴 지문을 더듬어 찾는 동안
  나는 잠시 바람의 옷을 빌려 입었는지도 모른다
  스물 세 송이의 꽃들이 티크장 속에 숨어 잠들 때도
  흔들리지 않던 반변천 별무리

 

  어둠의 안쪽에서 뛰어내리는 별똥별의 흰 발목을 보며
  나는 내 안에서 좀약 같은 박하향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시폰 블라우스가 흰 날개를 하늘거리며 먼 시간을 날고 있는 동안
  길이 길을 버리고
  크고 작은 기억의 돌멩이들을 쏟아내며 간신히 완성되는 밤

 

꽃눈 꿰어 십자수 놓는 법 / 권영랑

 

 

  꽃눈 꿰어 십자수 놓을 때는 햇볕의 보법을 따라야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중심에서 밖으로, 순서대로 놓는다 한 칸씩 미뤄지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성급한 바람의 내심에 흔들려도 안 된다 진분홍 39번을 바늘에 꿰고 j y k b 혹은 ㄱㄷㅎ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문제가 있다면 상처에 덧댈 가위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랫단에 3칸 윗단에 3칸을 남기고 중심점을 확인한 후 속엣 울음 토해내듯 차근차근 수를 놓아가면 우련히 꽃무늬 돋아나고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날 것이다 그 때 수틀을 벗겨내고 다짐하듯 박음질을 한다 장미가 곱게 피고 기다리던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낯익은 꽃잎 하나가 허공을 꿰어 길게 잡아당기는 순간

 

<시작> 2010년 겨울호